로그인

회원가입 | ID/PW 찾기

중국 뉴스

[김두일의 정글만리] 6장 -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모험왕 2015-07-01 14:09:46
/webzine/china/nboard/240/?n=59243 주소복사

[김두일의 정글만리] 6장 -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은 왔지만 봄 같지가 않구나~

 

쓰촨의 늦가을에서 늦봄까지 날씨가 다소 쌀쌀한 계절에는 유난히 닭들의 닭짓(?)을 많이 경험하게 된다.

 

평범한 우리의 상식으로는 닭이 울면 아침이 온다인데 쓰촨에서는 그런 상식이 전혀 통하지가 않는다. 정신 나간 닭들은 아침, 점심, 저녁, 새벽을 가리지도 않고, 심지어 날씨에도 영향 받지 않으며 수시로 울어 젖힌다. 그러다보니 겨울에서 봄이 지나가는 시기에는 그곳 충조우 거리에 온통 꼬끼오소리가 끊기지 않을 정도였다.

 

길거리에는 이렇게 닭을 판매하는 매장(?)이 종종 눈에 띈다. 물론 살아있는 닭이다. 



거리에서 꼬끼오~ 소리가 자주 들리는 이유도 이렇게 운송(?)되고 있기 때문.

 

그 이유는 그 지역 특유의 음식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요즘은 한국에서도 꽤나 알려진 중국식 샤브샤브 요리인 '훠거'라는 음식 탓이다. 

 

쓰촨 사람들은 사계절 가리지 않고 훠거를 즐겨 먹지만 아무래도 날씨가 서늘한 겨울철에 먹는 따듯한 음식 훠거가 좀 더 맛있게 느껴지나 보다. , 돼지, , , , 야크, 오리, 토끼, 개구리, 물고기, 정체를 알 수 없는 (알고 싶지도 않은) 이상한 고기와 각종 야채를 넣어서 특유의 양념에 찍어 먹는 훠거는 쓰촨사람들에게는 일종의 자존심과도 같은 요리이다. 같은 쓰촨에 있지만 직할시 독립 문제로 서로 사이가 안 좋은 청두 사람들과 충칭 사람들은 누가 더 맵고’, ‘누가 원조인지문제로 논쟁하곤 한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쓰촨 사람들은 요리를 가지고 누구의 음식이 중화제일이냐?’ 문제로 광동성 사람들과 논쟁하고, 빠이주(백주)로는 어떤 술이 최고냐를 놓고 산서성 사람들과 논쟁한다. 심지어 마작의 룰을 가지고도 어떤 것이 진정한 도박의 궁극이냐를 가지고 여타 지역사람들과 논쟁한다고 하니 그만큼 지역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훠거의 재료 중 겨울철 가장 호평 받는 것이 그 지역에서는 닭이라는 것까지는 한국의 치맥문화에 익숙한 내 입장에서는 충분히 공감이 되는데, 문제는 그 닭들이 한국에서처럼 가공된 형태로 식당에 공급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채로 공수되어 직접 키우다가 음식재료로 사용이 된다는 점이다.

 

다양한 식재료를 이용하는 훠궈. 일명 중국식 샤부샤부

 

물론 같은 지방이지만 도시에 따라 어떤 훠궈가 원조인지 논쟁이 일 정도.

 

그러다보니 마당이 딸린 집이라면 닭들이 (자신들에게 다가올 운명도 짐작하지 못한 채)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고, 거리에서는 가로수에 (개도 아닌데) 묶여 있는 닭들을 흔히 목격할 수 있다. 그러니 온 도시가 닭들의 아우성으로 겨울 내내 시끄러울 수 밖에 없다. 심지어 훠거집 앞이나 식당 앞 거리에는 양계장도 아닌데 닭장이 버젖하게 있다. 그 옆에는 보기에는 우스꽝스러우나 섬뜩한 닭 잡는 기계(과연 이것을 기계라고 표현할 수 있다면 말이다)가 놓여있다.

 

길이나 버스 안에서 살아있는 닭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흔하고, 시장에서 산 닭을 파는 풍경도 흔히 볼 수 있는 익숙한 생활의 모습이다. 필자의 가족도 겨울 내내 지겹도록 닭을 주재료로 한 훠궈를 먹었다. 그 당시에는 생맥주에 프라이드치킨이 정말 그리웠는데 상하이에 거주하고 있는 요즘은 그 당시 동네에서 즐겨 먹었던 쓰촨훠거가 자주 생각이 난다. 이렇듯 사람 입맛은 환경과 시대에 따라 바뀌나보다. 간사한 입맛 같으니……

 

닭은 신선도가 최고라는 신념을 가진 듯. 

 

봄이 왔다. 하지만 봄이 온 것 같지가 않았다.

 

이유는 여전히 내 생활은 처음 이곳 쓰촨에 도착했을 때와 바뀐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오전에는 중국어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학교에 가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2회는 지역 유지들과 식사를 하고, 주말은 가족과 함께 보낸다. 사실 평화로웠다. 내 일생에 이렇게 한가하고 평화로운 시기가 있을까 할 정도로 무난하고 평범했다. 적어도 먹고 자는 기초생활 문제만큼은 학교에서 해결해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마음은 편치 않았다. 나는 게임을 만들러 왔지, 게임을 만드는 법을 가르치러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프로젝트 관련해서 여전히 어떠한 소식도 없었다. 나를 쓰촨에 데리고 온 왕총장은 학교에 나타나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갈망과 체념이 교차했다.

 

<삼국지>를 보면 비육지탄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온다. 유비가 조조군에게 대패하고 유랑생활을 하다가 형주성 유표에게 의지하게 되면서부터 안정을 찾았는데, 어느 날 술자리에서 화장실에 다녀오다가 허벅지에 살이 찐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게 된다. 대의를 품고 고향을 떠났는데 이룬 것이 하나도 없이 그저 몸과 마음이 편해져서 (말을 타고 다니던 시절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허벅지에 살이 찐 것에 스스로 반성하고 회한하는 대목이다. 당시 내 상황이 딱 비육지탄에 맞는 상황이 아니었을까?

 

아울러 아내에게도 힘든 시간이 다가왔다. 우울증이 찾아온 것이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남편 출근시키고 아이 학교 보내면 가정주부는 할 일이 없다. 따로 중국어 공부를 위해 학교를 등록하자니 너무 먼 곳까지 통학을 해야 해서 불가능했다. 우리 가족은 충조우에 사는 유일한 외국인인지라 교류를 폭넓게 하기에는 언어나 문화적으로 쉽지 않았다

 

마당 앞에서 마작을 하거나 훠궈를 먹으며 사람들과 교류를 하기에는 언어나 문화적으로 쉽지 않은 문제... 

 

결정적으로 쓰촨은 날씨가 안좋았다. 맑은 하늘을 보기 힘든 우중충한 날씨가 1년의 대부분을 지배했으며 그것이 그녀를 더 우울하게 했다. 런던의 하늘처럼 늘 안개가 낀 듯한, 혹은 비가 올 것 같은 날씨다 보니 그녀는 한국의 맑은 하늘을 그리워했다. 나는 무심한 남자답게 하늘이 맑건 흐리건 전혀 관심도 없었다. 아울러 한국 식당도 주변에 없고, 한국 위성 드라마를 볼 수도 없고, 주변 동네 사람들과 말도 안 통하고, 인터넷 전화기도 없던 시절이니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의 통화도 아주 가끔밖에 할 수 없었다. 이 모든 상황이 아내에게는 꽤 힘든 시절이었을 것이다. 비육지탄과는 다른 의미에서 어려운 시간이 닥친 것이다.

 

유정이도 쉽지만은 않았다. 말이 하나도 안 통하는 학교에 가서 배우는 것도 힘들었지만, 학교 급식은 놀라울 정도로 열악했으며, 화장실은 내 어릴 적에나 보던 재래식(푸세식)이었으고, 자신의 모든 것을 신기해 하는 급우들과의 관계도 쉽지만은 않았다. 결정적으로 어느 날 유정이가 이런 질문을 했다. “아빠, 난 한국 사람인데 왜 중국역사를 배워야 하고 아침마다 오성홍기(중국국기)에 경래를 해야 하는 거지? 말문이 막힐 턱 막힐 정도였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고 중국에 왔으니 중국법을 따르는 수 밖에……”라고 대답했지만 어쩐지 궁색한 답변이었다.

 

그 무렵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의 내 공백이 더 길어지면 게임업계에서 내 자리는 완전히 사라질 것만 같았고 외딴곳에서 어떠한 기반도 없이 생활해야 하는 가족들을 고충이 느껴지는지라 나에게도 쉽지 않았다. 내 스스로도 이 무모한 도전을 멈추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욕망이 생겨났다.

 

이렇듯 우리 가족 각각의 관점에서 향수병과 우울증, 그리고 앞날에 대한 불안함 속에서 갈등이 싹 틀 상황에서 다시 가족들이 하나가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생겼다.

 

어느 봄날 아내가 가족들에게 조용히 둘째의 임신소식을 알렸다. 기쁨과 놀라움이 교차했다. 큰 딸 유정이가 당시 이미 8세였고 이 험난한 시기에 아이 하나를 키우는 것도 힘들다고 생각했던 시절인지라 사실 계획된 임신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내의 임신소식은 각자 힘들어 하던 가족 구성원들을 다시 하나로 뭉치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다시금 마음을 잡고 중국생활에 집중하게 되었다.

 

임신초반에는 착상이 바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유정이의 담임선생님 씨에라오스 남편의 병원에 갔는데 정말 엄청나게 많은 약을 처방해 주었다. 임산부는 그 어떤 약도 조심해야 하는 한국에서의 경험과 정서와는 완전히 달라 당황했다. 병원비는 매우 싼데 약값이 비싸다는 것도 인상적인 경험이었다. 그렇다. 중국의 일반병원은 병원비는 매우 저렴하다. 하지만 약값은 한국보다 비싸다. 중국에서 병원에 가실 분들은 참조하시길 바란다.

 

 

쓰촨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산부인과가 있다는 쓰촨대학 부속병원에 갔다. 대학병원인지라 크고 시설은 좋았는데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다. 중국은 1가구 1자녀 출산이 법으로 정해진 바, 중국인들도 출산만큼은 최고의 병원에서 하기를 바란다는 것이고 그로 인해 이 병원에는 사람(임산부)이 너무 많았다. 산부인과에서 특히 신경 써야 할 프라이버시 존중이 전혀 이뤄지지 못했다

 

가령 초반 착상이 제대로 안된 상황의 우리 아기의 초음파 사진을 뒤에 줄 서 있던 중국 임산부와 그 보호자(주로 친정엄마나 시어머니 등)들이 삥 둘러싸서 한마디씩 하는 격이다. 한국인이 여기서 아기를 낳는가?’라는 호기심 섞인 질문부터 아기가 제대로 들어서지 않았네’, ‘중약을 달여서 먹어라는 등 의사를 앞에 두고 온갖 이야기가 나왔다. 보건소에서 예방주사 맞는 것도 아닌데, 뒤에 환자들이 다 방에 들어와서 줄 서 있는 것이 그 당시 그 지역에서 가장 큰 쓰촨대학 부속병원 산부인과의 풍경이었다. 심지어 옆에서는 간단한 휘장 하나 치고 다리를 벌리고 누워서 진료 받는 임산부들도 있었으니 아내나 나나 기겁을 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시설이 좀 열악하더라도 1. 프라이버시를 존중 받을 수 있고 2.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찾을 수 있을 만큼 조용하고 3. 의사와 직접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병원을 수소문 끝에 찾을 수 있었다. 물론 씨에라오스의 의사 남편 덕분이었다. 병원이라기보다는 보건소 수준의 시설에 가까워서 불안했지만 대신 담당의사가 영어가 통하는, 그리고 산모가 외국인이라 특별히 예약을 하면 그 시간에는 다른 산모를 받지 않고 우리만 진료를 받을 수 있는 특별한 혜택을 주던, 아마 쓰촨에서 유일한 병원이었을 것이다.

 

우리 부부는 이곳 병원에서 둘째를 출산하기로 결심했고 준비를 해 나갔다.

최신목록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