깔끔한 선 처리와 선명한 색감, 캐릭터의 특징을 잘 살린 일러스트로 <엘소드>유저들에게 좋은 호응을 얻은 사람이 있다. KOG의 김인 컨셉 아티스트다. ‘즉흥환상’이라는 닉네임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엘소드>런칭 10주년을 맞아 업데이트된 3차 전직의 캐릭터 컨셉을 담당해 작업했다. 그는 "컨셉 아티스트로써
작업하면서,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은 물론이고 기획자로서의 역량도 어느정도 필요했었다"고 말했다.
김인 아티스트는 <엘소드>의 3차 전직 업데이트를 준비하면서 ‘사랑 받는 캐릭터를 만들 수 있는
공식은 없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했다. 그는 ‘일러스트레이터’가 아닌 ‘작업자’로써 일하면서 질문에 대한 답을 구했고, 그것을 이번 '<엘소드> 3차전직 비주얼컨셉 포스트모템 - 사랑할 수 있는, 사랑받는 캐릭터 만들기' 강연에서 이야기했다. /디스이즈게임 박수민 기자
# '왜 이런 상황이 됐는지' 파악해라
김인 아티스트는 예술가와 기획자 사이의 존재로써 일했다. 캐릭터의
컨셉을 기획하는 일은 원화를 그리는 것이나 삽화를 그리는 것과 달리 자신의 기획과 생각을 드러내고 정리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게임의 전반적인 상황을 파악하고, 개발자와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파악해야 했다.
그는 <엘소드>의
배경상황을 파악하는 것으로 기획을 시작했다. 그 이유에 대해 김인 아티스트는 “모든 상황에는 그에 상응하는 배경이 있다. 이 배경을 파악하지 않고
무작정 시작하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3차 전직 업데이트를 앞둔 <엘소드>의 배경은 어땠을까. 캐릭터 관련 업데이트는 대부분 신규 캐릭터 추가나 새로운 직업군 추가가 주를 이룬다. 그런데 당시 <엘소드>에는 13명의 캐릭터가 있었고,
74개의 전직이 있었다. 컨텐츠가 가로로 넓어지고(하나의
캐릭터에 깊이가 생기기 보단 양이 늘어나고) 출시된 지 오래된 캐릭터의 존재감이 옅어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그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엘소드>는 캐릭터간 유대를 강화시키고 깊이를 더하기 위한 업데이트를 진행한 상태였다. 스토리 업데이트를 통해 캐릭터간 있었던 스토리적 공백을 메우거나, 스토리의
복선을 회수하거나, 캐릭터 개별의 심리 상태를 다루거나.
스토리 업데이트 결과, <엘소드>의 스토리는 캐릭터의 내면이 성장하는 방향으로 작동했다. 동료를
희생시켜야 했고, 세계를 구하기 위해 그 희생을 스스로 선택해야 했다.
김인 아티스트는 이를 “정상결전 직후의 <원피스>와 비슷한 상태였다”고 표현했다. 중요 인물의 죽음, 강대한 적의 등장, 다음 성장의 발판 마련 등이 <엘소드>의 당시 상황과 비슷한 점이었다.
김인 아티스트는 “정신적, 육체적
성장이 이뤄진 캐릭터를 보면, 유저들은 외형적 변화를 기대하게 된다”고
말했다. <원피스>에서 루피의 가슴에 흉터가 생기고, 조로가 애꾸눈이 됐던 것처럼 말이다. 그는 이런 외형적 변화에 대한
욕구가 <엘소드>에서도 작용하고 있을 것이라 보았다. 따라서 <엘소드> 3차
전직 캐릭터의 디자인은 큰 변화를 겪게 됐다.
# 창의력은 살리면서도 엇나가지 않게
‘큰 역경을 겪은 캐릭터들이 외형적으로 큰 변화를 맞이한다’는 배경을 파악했다면, 다음은 그 배경과 컨셉을 어떻게 실현시킬 것인지가
과제로 남게 된다. 팀이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방법은 다양하다. 김인
아티스트는 “정상까지 가는 길은 많은데, 어디로 가야 무사히
목적지로 갈 수 있을까 하고 고민했다”고 말했다.
그는 ‘지휘관이 명령하는 세 가지 방법’을 설명함으로써 그 다양한 길을 설명했다. 지시에 의한 명령, 계획에 의한 명령, 의도에 의한 명령이 그것이다.
지시에 의한 명령(통제지휘)은
조직원의 행동을 일일히 지시하는 것을 뜻한다. 어떤 옷을 만든다고 가정했을 때, ‘이 패턴을 쓰고, 이 모양의 주머니를 달고, 이 마감 방법을 써라’하고 명령하는 것이다.
계획에 의한 명령(감독지휘)은
시한을 정해주는 방식이다. 같은 옷을 만드는 상황에서도 ‘이
때까지 컨셉을 정하고, 이 때까지 시안을 만들고, 이 때까지
마감을 해라’라는 식이다.
의도에 의한 명령(임무지휘)은
지휘관의 의도만 조직원에게 설명해 주는 방식이다. ‘우리의 타겟은
10대고, 여름 출시 목적이다’라는 식이다.
김인 아티스트는 세 명령 방식 중 임무지휘가 가장 자존성이 높으며, 개인의
자율성을 보장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임무지휘의 경우 조직원에게 많은 권한을 위임하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창의력을 발휘할 기회가 많아진다고도 했다.
김인 아티스트는 그의 팀에게 명령하는 방식으로 이 임무지휘 방식을 선택했다. 일러스트레이터의 아이디어와 생각을 제약하지 않고, 창의력을 마음껏
발산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엘소드>에는 수많은
캐릭터(74개의 직업군이 있다는 말은 74개의 캐릭터가 있다는
말과 같다)가 있었고, 그 캐릭터 모두에게 매력을 부여하려면
창의력이 필요하니까.
다만 캐릭터의 디자인이 아주 엇나가지 않도록 어느 정도의 ‘룰’은 필요했다. 김인 아티스트는 자신이 해야 했던 ‘컨셉 디자인’이 이 룰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아티스트들이 빗나간 컨셉을 잡고 작업하지 않도록최소한의 안전장치가
되어주고, 캐릭터 디자인의 방향을 잃을 때 가이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알맞은 컨셉을 잡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대신 이 룰은 ‘이렇게 해라’가
아닌, ‘이것만 지키면 뭐든 해도 된다’라는 뉘앙스로 설정했다. 룰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실상은 ‘고려해 볼 사항 정도’에 머무르게 했다. 아티스트의 창의성을 해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 ‘룰’에 들어간 컨셉
요소는 캐릭터의 핵심 요소, 상징성, 성격 등이었다.
유연하고 자유로운 업무에 맞춰 보고 체계 또한 수평적으로 짜여졌다. 각
아티스트와 담당자가 짝을 이뤄 작은 단위를 형성하고, 각 단위가 실시간으로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채널을
마련했다. 김인 아티스트는 이 때 중요한 것은 “담당자는
조언자로서의 역할만 담당하고, 결정은 아티스트가 내릴 수 있게 한 것과, 공유 채널을 통해 작업의 진행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 한 것”이었다고
덧붙였다
실시간으로 정보를 공유하자 정기 회의의 의미가 사라졌다. 회의할
내용을 모든 구성원이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결정권이 각 구성원에게 있었기 때문에 리더와
담당자의 ‘의사결정 부담’도 줄어들었다. 담당자와 아티스트 사이가 긴밀해져 의사소통 비용도 적게 들었다.
이런 조직 구조에 대해 김인 아티스트는 “<엘소드>가 런칭되고 오랜 시간이 흘렀고, 팀원들 사이에 ‘엘소드는 이래야지’라는 암묵적인 룰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덧붙였다.
# 캐릭터는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지만 얻지 못하고 있는 사람'
그렇다면, 팀원들의 안전장치이자 가이드 역할을 수행한 김인 아티스트의
‘컨셉’은 어떻게 구성됐을까. 그는 3차 전직 업데이트를 예시로 자신이 캐릭터 컨셉을 기획한 과정을 설명했다.
그는 3차 전직 업데이트 전체를 구상할 때, ‘왜’라는 질문을 통해 본질을 파악했듯이, 캐릭터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어떤 이야기 속에서 캐릭터는
하나의 ‘인물’인데, 김인
아티스트는 이 인물을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지만 얻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으로 규정했다.
또한 이야기 속에는 인물이 목표를 성취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장애물이 있는데, 이 장애물을 돌파해 나가는 과정에서 캐릭터의 성격이 발생한다고 김인 아티스트는 설명했다. 저돌적인 성격의 인물은 장애물을 힘으로 뚫고 나갈 것이고, 민첩한
인물은 장애물을 회피해 지나갈 것이라는 게 그의 예시다.
따라서 캐릭터는 ‘목적’과
장애물을 해쳐 나가는 ‘행동’으로 구성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새어 나온 캐릭터의 성격이 캐릭터의 외형을 구성한다. 김인
아티스트는 만화 <나루토>의 등장인물 ‘나루토’로 자세한 예시를 들었다. 나루토의
목적은 마을 구성원에게 인정받는 것이고, 행동은 ‘최고의
닌자로 성장해 호카게가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의 캐릭터가 동일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여러 가지 행동을 구사한다면
어떻게 될까. 김인 아티스트는 <엘소드>의 캐릭터들이 그런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하나의 캐릭터가 ‘전직’에 따라 다른 행동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브’라는 단일한 캐릭터 안에서도 전직에 따라 다양한 행동 양상이 나온다
3차 전직 작업은 분리된 이 행동 양상을 심화시켜 표현하는 작업이었다. 김인 아티스트는 “기존의 행동 양상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쉬워
보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는 두 가지 문제점을 꼽았다.
먼저 <엘소드>의 수많은 캐릭터가 문제됐다. 당시 74개의 캐릭터들은 각각 매력포인트를 가지고 있었고, 그에 따라 각자의 ‘포지션’을 가지고 있었다. 새로운 캐릭터, 즉 3차 전직 캐릭터는 자신의 특징을 잘 살리면서도, 각자의 새로운 포지션을 차지해야 했다. 일종의 ‘매력 레드오션’인 셈이다.
다음으로 하나의 캐릭터에도 많은 캐릭터가 존재한다는 점이 문제가 됐다. 하나의
캐릭터에서 갈라져 나온 전직 캐릭터들이 서로의 경쟁상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아무리 행동양상이 다르다
할지라도, 본류는 같은 캐릭터이기 때문에 이들은 어느 정도 매력 포인트를 공유하고 있다. 이 부분을 최소화 하면서 개성있고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어야 했다.
그는 “그래서 자칫하면, 전직을
했는데도 다른 캐릭터와 차이점이 없는(개성이 없는) 상황이
생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를 해결하려면 캐릭터의 명확한
매력 포인트를 짚어 컨셉을 세워야 했다.
캐릭터가 돋보일 수 있도록, 김인 아티스트는 캐릭터에게 필요한
것을 키워드로 정리했다. ‘시각적인’ ‘명확한’ ‘상징적인’ 키워드를 단어로 뽑아냈다. 이
키워드의 적용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루시엘의 3차 전직 카타스트로피의 ‘루’에 해당하는 ‘티모리아’의 키워드를 공개했다.
그는 처음에 ‘소악마’ ‘펑키’ ‘공포의 군주’등, 단어로 된 키워드를 세웠지만, 효과적으로 와닿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던 도중 미리 정해진 ‘티모리아’라는
이름에서 힌트를 얻었다. ‘티모리아’는 징벌자라는 뜻이다.
‘징벌자’ 이미지를
바탕으로 더 자세한 키워드를 뽑아내고, 그 키워드를 바탕으로 ‘달콤살벌한
꼬마 독재자’라는 문장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캐릭터의 느낌을
효과적으로 연상시키는 하나의 문장이 만들어지자, 복장이나 외형 등의 컨셉이 줄줄이 이어져 나왔다.
김인 아티스트는 그때 깨달았다. 컨셉 키워드는 단순한 단어로
나열하는 것 보다, 시각적인 연상이 가능한 한 문장으로 만드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걸.
이러한 깨달음은 다른 캐릭터의 3차 각성 컨셉을 잡을 때에도 적용됐다.
그럼 명확하고 개성있는 컨셉을 가진 캐릭터는 ‘확실히’ 사랑받을 수 있을까? 김인
아티스트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대답했다. 그는 “컨셉은 캐릭터가 사랑받기 위해 거치는 검증의 한 수단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사랑받는 캐릭터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김인 아티스트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하기 보단, 확실한 한 마리의 토끼를 잡으라고 조언했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려는 사고는 반드시 실패한다”는 피트 윌슨의 말을 참고했다.
"내가 만든 컨셉을 보고, 캐릭터 모델러가 '정말 만들어 보고 싶다'는 말을 하게끔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