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스컴 2024 현장에는 전쟁을 소재로 삼은 두 개의 특별한 게임이 출품됐습니다. 우크라이나 개발사 트위게임즈의 <할로우 홈>, 그리고 독일 개발사 비핀비츠의 <PVKK: Planetenverteidigenkanonelommandant>(이하 PVKK)입니다.
<PVKK>는 이번 게임스컴 어워드에서 최고의 게임플레이, 최고의 엔터테인먼트 부문에 노미네이트될 정도로 흔치 않은 게임플레이 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게임 제목이기도 한 행성방위포사령관(PVKK)이 되어, 외딴 기지에서 단독 사격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게임의 내용입니다.
인디 공간에 출품한 <PVKK>
주인공은 변경의 산중에 배치된 벙커에 갇혀, 홀로 대구경 포를 조작해 국경으로 다가오는 비행체 등 적 위협을 무력화해야 합니다. 적은 상당히 느리게 접근하지만, 그만큼 대포의 조작도 간단하지 않아 자연스럽게 긴장감이 형성됩니다.
대포는 의도적으로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쳐 발사하게 디자인되었습니다. 발전기 가동부터 시작해, 기기 전원 공급, 레이더 조작, 표적 고정, 탄종 선택 및 장전, 사격각 조정 및 고정, 탄두 활성화, 장약 활성화까지의 전 과정을 직접 마우스로 하나하나 조작해야만 겨우 한 발을 쏠 수 있습니다.
적과의 거리는 포탄이 한참을 날아가야 할 만큼 멀고, 적은 계속해서 이동하기 때문에 생각보다 명중이 쉽지 않습니다.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면 다음 이야기와 새 미션이 주어지고, 기지를 부분적으로 업그레이드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포탄의 파괴력은 강력하고 적기 격추 장면을 눈으로 확인할 수도 있으나, 여전히 전투 한복판에 놓이는 일반적 전쟁물과는 정서가 다릅니다. 머나먼 작전 거리 때문인지 현장감이 바로 와닿지 않는데, 이 의도적 유리감이 오히려 전쟁의 비정함을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한편 전체주의(로 추정되는) 가상 국가 일원이 되어 한정된 공간에서 업무를 처리하고 돌발적 상황들에 정치적 선택을 내리는 일련의 과정은 어떤 유명 게임을 떠올리게 하는데요. <페이퍼 플리즈>가 연상되었다면 정확합니다. 현장에서 만난 개발자는 이 게임이 <페이퍼 플리즈>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고 밝혔습니다.
떠오르는 게임이 하나 더 있습니다. 뉴스 방송 편집자 시점으로 진행되는 FMV 게임 <낫 포 브로드캐스트>입니다. 실시간으로 펼쳐지는 돌발 상황에 복잡한 기계 조작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점, 임무가 점점 어려워진다는 점, 주인공의 정치적 선택에 따라 엔딩이 달라진다는 점 등이 유사합니다.
또한 <낫 포 브로드캐스트> 처럼 이 게임의 주요 ‘팩션’들 역시 선악의 구별이 모호하게 그려진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세태 풍자적이었던 <낫 포 브로드캐스트>에 비해 <PVKK>에는 뚜렷한 메시지가 담기지 않았습니다.
개발자에 따르면 <PVKK>에는 전하고자 하는 교훈이 따로 없다고 합니다. 다만 선택을 강요하는 두 집단 사이에서 유저를 내러티브적 딜레마에 빠뜨리는 재미에 주로 초점을 맞춥니다. 주인공의 활동무대를 좁은 기지 내부로 한정한 것에도 특별한 연출적 의도는 없습니다. 단지 그것이 개발팀 규모(약 10명)에 어울렸기 때문이었다고 개발자는 밝혔습니다.
두 번째로 살펴볼 <할로우 홈>은 전쟁을 실제로 겪고 있는 우크라이나 개발자들이 만든 일종의 임팩트 게임입니다.
<할로우 홈>은 <디스코 엘리시움>과 <디스 워 오브 마인>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전지적 작가 시점의 텍스트, 주인공의 내면세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게임플레이에서는 <디스코 엘리시움>이 연상됩니다
주인공 막심의 정신/심리적 성향이 대화에서 일종의 ‘스킬 체크’(해당 선택지에 필요한 능력치를 지녔는지 게임 시스템이 확인하는 메커니즘) 기준으로 작동하는 점 또한 비슷합니다. 전반적인 색감과 애니메이션에서도 그 흔적을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한편 포위된 도시에서 무력한 주인공이 되어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이는 스토리라인은 <디스 워 오브 마인>을 참고했습니다.
<디스 워 오브 마인>은 1990년대 있었던 사라예보 포위전에서 모티브를 따왔습니다. 그리고 <할로우 홈>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의 마리우폴 포위전에서 직접 탈출한 제작진의 경험이 녹아 들어 있습니다.
<디스 워 오브 마인>은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아무런 영광 없이 스러지는 민간의 비극을 알린 게임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이 출시된 2014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무력 갈등이 빚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결국 현대사에 다시없어야 할 전면전과 도시 포위가 재현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를 모티브 삼은 게임이 또 나와야 했다는 사실은 생각해 보면 참담합니다.
이 게임이 폴란드 공동관을 통해 게임스컴 2024에 출품했다는 사실도 곱씹어볼 만합니다. 국경을 맞댄 역사적 앙숙이던 폴란드와 우크라이나는, 현대에 들어 러시아를 공공의 적으로 두면서 이전보다 가까워졌는데요, 전쟁이 발발했을 때 우크라이나 난민을 앞장서 수용한 나라 중 하나가 폴란드이기도 합니다.
또한 폴란드는 근대에 전쟁의 참화를 크게 겪은 나라로 유명합니다. 그래서일까요? 기자가 게임 부스를 찾았을 때 개발진들은 우크라이나로 돌아가고 없었지만, 대신 폴란드 공동관 관계자들이 와서 개발진에게 직접 들은 게임 특징과 개발 비화를 열성적으로 설명해 줬습니다.
이들의 설명에 따르면 <할로우 홈>은 마리우폴 포위 공격에서 살아남은 우크라이나인들의 실제 사연을 모아 만들어진 게임입니다. 게임 제작 소식에 수많은 피해 사례가 빠르게 수집됐고, 이를 조합해서 개발진은 인게임 스토리와 퀘스트를 현실적으로 디자인할 수 있었습니다.
한 발 더 나가서 주인공 ‘막심’은 개발진 중 한 사람의 자녀를 직접 반영해 만들어졌는데요. 인게임에서 막심이 제기하는 일부 의문들은 해당 어린이가 실제로 부모에게 던졌던 질문을 각색한 것입니다.
가령 아파트 주민들이 집을 놔두고 건물 복도에서 잠을 청하는 이유를 궁금해하는 장면이 그중 하나인데, 이건 야간에 공습을 받아 창문이 파괴되면 크게 다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체험 분량에서는 게임의 첫 부분을 플레이할 수 있습니다. 공습 하루 전 시점에 게임은 시작되는데, 전쟁이 터질 거라는 소문은 이미 파다하게 퍼져 있지만 상당수 시민은 이를 부정하고 싶어 합니다. 수년이 지난 이 시점에도 여전히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이니,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만합니다.
나란히 게임스컴 2024에 출품한 두 게임이 전쟁을 바라보는 관점은 서로 꽤 다릅니다. ‘소재’에 불과하면 좋았을 전쟁이 <할로우 홈> 개발진에게는 맞닥뜨린 현실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할로우 홈> 개발자들이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기자는 그들의 휴식이 아니라 안전을 빌어야 했습니다.
폴란드 공동관 관계자들에 따르면, <할로우 홈> 개발진의 목표는 역시나 게임의 파급력을 통해 진상을 알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할로우 홈>이 무사히 출시되어 많은 게이머에게 플레이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