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평등·포용(DEI)을 권장하는 운동이 최근 들어 창안되었다는 오해를 간혹 만나볼 수 있다. 물론 DEI라는 약어가 등장한 것은 2000년대 초반이다. 하지만 DEI를 이루는 세 가지 개념은 미국 흑인 시민권 운동이 일단락되었던 1960년대 중반 현지의 여러 일터에서부터 권장되기 시작했다.
물론 이를 통해 실질적 차별 방지가 이뤄지지는 못했고, 다양성 운동은 이후로도 지속했다. 90년대 들어서는 다양성 운동에 인종뿐만이 아닌 종교 및 성 지향적 다양성까지 고려되어야 한다는 논의가 대두하면서 다소의 반발도 따랐다. 흑인 차별 철폐조차 아직 완료되지 않은 상황에서 동력을 분산시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에 다문화 개념이 정착하던 당시 상황에 힘입어 결국 다양성 개념의 외연 확대는 이뤄졌다. 그러면서 관련 운동에도 방법론적 변화가 함께 찾아온다. 이전까지는 차별 상황에 일일이 대응해 경각심을 환기하는 형태가 주를 이뤘다면 이때부터는 근본적 차원의 다양성 인식을 함양해 시민들이 서로 어울릴 수 있게끔 하는 ‘교육’과 ‘훈련’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출처: 픽사베이)
같은 시기 현지 기업들은 사내 다양성 정착에 더 공격적으로 나서게 됐다. 몇몇 대기업이 인종차별 소송으로 천문학적 수준의 배상을 한 것이 계기의 하나로 평가된다. 1996년 석유기업 ‘텍사코’가 1억 7,600달러 합의금, 1999년에는 코카콜라가 1억 9,250만 달러 합의금을 낸 것이 대표적 예시다. 이후 기업들은 ‘최고 다양성 책임자’ 등 관련 직책을 만들어 노력을 강화했고, 이는 지금까지 이어진다.
이렇듯 미국 사회에서 다양성 담론은 오랫동안 지속하며 분화, 심화했다. 오랜 투쟁으로 민주화를 이룩한 한국 사회가 지금도 시민 주도의 민주적 질서 유지에 유독 민감한 것처럼, 인종차별이 늘 사회 분열의 주요 원인이었던 미국은 다양성 논의를 중대한 화두로 삼아 왔다.
이런 경향은 2010년대 중반에 들어 ‘정체성 정치’가 대세로 자리 잡으며 더욱 격화하고 있다. 정견이 아닌 인종·성별·종교적 정체성을 중심으로 정치 그룹이 형성되면서, 공약이나 정책보다 정체성 레토릭이 정치적 자산 확보에 있어 더 중요한 수단이 된 것. 이는 미국뿐만 아니라 그 문화의 직간접적 영향을 받는 한국 등 기타 국가에서도 관측되고 있다.
지난해 업계의 다양성 이슈에 대한 국내외 게이머들의 관심은 이전보다 더욱더 커졌다. 다양성을 적극 수용한 일부 타이틀이 시장에서 실패하는 등 굵직한 관련 사례들이 수차례 화제를 모았기 때문. 이에 대한 유저 반응과 여론은 다각적으로 나타났다.
▲<콘코드>의 사례
지난해 소니의 PvP 슈터 <콘코드>는 최소 2억 달러(약 2,913억 원) 손실을 발생시킨 채 출시 2주 만에 서비스를 종료했다.
경쟁작 대비 부족한 독창성과 높은 가격 등, 실패의 원인으로 꼽히는 요소는 여러 가지다. 하지만 잘 알려진바 유저들 사이에서 다른 요소들을 제치고 가장 집중적으로 화제가 된 것은 게임에 등장하는 다양성 관련 설정과 표현들이다.
<콘코드>에는 여러 인종과 성 정체성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또한 캐릭터 선택 창에는 인물의 여러 특성에 더불어 각자 선택한 대명사가 표시된다. 캐릭터들이 남성형 대명사(he/him), 여성형 대명사(she/her), 중립적 대명사(them/they) 중 무엇으로 불리기를 원하는지 알 수 있다.
<콘코드>
적지 않은 유저는 이러한 다양성 표현이 게임 흥행 실패의 직접적 원인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게이머 절대다수가 게임 내에서 다양성 표현을 마주하고 싶어 하지 않으며, 따라서 <콘코드>가 유저를 끌어모으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직접적 반례가 상당수 존재한다. 동일한 슈터 장르로서 수년간 글로벌 흥행을 이어간 <에이펙스 레전드>가 대표적이다. <에이펙스 레전드> 역시 캐릭터 로스터에 인종·성 정체성 측면의 다양성을 적극 포용하고 있으나, 이는 게임의 발목을 잡지 못했다.
이와는 별개로 개발사 파이어워크 스튜디오가 남성과 백인을 차별하고, 이들을 소통에서 제외하면서 전체 개발에 악영향을 미쳤다는 익명의 내부고발이 화제를 모으며 흥행 실패의 원인으로 부각되기도 했다. 다만 고발자의 신원을 뒷받침할 증거가 따로 제시되지 않아 현재로서는 하나의 ‘설’로 남아 있다.
<에이펙스 레전드>
▲<드래곤 에이지: 베일가드>의 사례
한편 지난해 출시한 <드래곤 에이지> 시리즈의 후속 작품 <드래곤 에이지: 베일가드>(이하 <베일가드>)는 <콘코드>의 사례와 조금 다른 차원의 논의를 촉발했다.
게임에는 남성이나 여성 중 어느 성에도 해당하지 않는 ‘논바이너리’ 정체성의 주연급 인물 ‘타쉬’가 등장한다. 일각에서는 트리플A 싱글 게임의 주요 인물로서 보기 드물게 성소수자가 기용됐다는 사실에 반가움을 표했다. 그러나 다른 일각에서는 다양성 묘사가 작품에 잘 어우러지지 못하면서 감상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지적하고 나섰다.
특히 논란이 된 영역은 용어 선택이다. 극 중에서 타쉬는 스스로를 직접적으로 ‘논바이너리’로 지칭하며 정체성을 밝힌다. 다만 이 용어가 통용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부터다. 이 때문에 중세 판타지 장르로서의 몰입이 흐려졌다는 비판이 나온다.
<드래곤 에이지 3: 인퀴지션> 개발진은 중세 판타지 안에서 트랜스젠더 정체성을 자연스럽게 설명하기 위해 가상의 용어 'Aqun-athlok'을 만들었다. (출처: 유튜브 채널 VGS - Video Game Sophistry)
전작 <드래곤 에이지 3: 인퀴지션>에서 시도되었던 다양성 표현의 방식과도 상반된다. 전작에서 제작진은 ‘특정 성별로 태어났으나 반대 성별로 사는 사람’에 해당하는 가상의 단어 ‘Aqun-athlok’을 새로 만들어 트랜스젠더 캐릭터 ‘크렘’(Krem)의 정체성을 되도록 배경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묘사했다.
타쉬와 주변 인물의 상호작용 묘사에서도 성소수자의 적절한 대변(representation)에 실패했다는 비평이 있다. 트랜스젠더 남성으로 알려진 해외 유튜버 “B-Tier Mutineer”는 ‘타쉬’의 동료가 그를 ‘그녀’로 잘못 지칭했다가 사과의 의미로 팔굽혀펴기하는 장면을 비판적 관점으로 조명했다.
그는 “누군가 나의 성별을 잘못 지칭할 경우, 나는 절대로 저렇게 그 상황을 부각시키길 원하지 않을 것이다”라며 “트랜스젠더를 놀림거리로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면, 왜 이런 장면을 만들었는지 모르겠다”고 의문을 제기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베일가드>가 성소수자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불만 여론은 크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할 만하다. 위에서 언급된 여러 묘사 상의 '완성도'에 논의가 집중되었기 때문일 수 있으나, 글로벌 게임 업계가 작중 소수자 표현을 계속함에 따라 이에 긍정적, 중립적 생각을 가지게 된(혹은 부정적 생각을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게 된) 유저 비율이 이전보다 늘어난 결과일 가능성도 있다.
'타쉬'의 성별을 잘못 말한 '이사벨라'가 팔굽혀펴기를 하는 장면 (출처: 유튜브 채널 Backseat Guides)
▲<더 위쳐 4>의 사례
다만 이 대목에서는 최근 공개된 <더 위쳐 4>의 주인공을 둘러싸고 해외 팬덤에 번졌던 한 가지 논란을 추가로 짚고 넘어갈 만하다.
<더 위쳐 4>의 주인공은 여성 캐릭터 ‘시릴라’로 밝혀졌다. 게임에서 여성 캐릭터가 주연을 맡는 것은 비교적 흔한 일인 데다 ‘시릴라’는 전편에서도 주인공으로 잠시 활약한 적 있다. 하지만 팬덤 일각은 제작진이 이를 통해 ‘다양성을 강요’했다며 분노를 표했다. 원작 설정상 여성은 절대로 위쳐가 될 수 없는데도 개발진이 다양성 담론을 강조하기 위해 이를 무시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사실은 이들 주장과 다른 듯하다. <위쳐> 원작 팬으로서 <위쳐> 게임을 자주 다뤄 온 해외 유튜버 Neon Knight는 ‘원작의 어느 부분에도 그런 언급은 없다’며 주장을 정면 반박했다. 그는 오히려 원작의 구체적인 구절들을 인용, 시릴라가 위쳐가 되기 위한 기초적 훈련을 모두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예니퍼 등 극중 인물들도 시릴라에게 ‘위쳐가 되어야 한다’는 조언(혹은 평가)를 말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위의 여러 사례에서 알아본 것처럼, 지난해 게임 속 다양성 묘사를 향한 유저 반응은 스펙트럼 형태로 분산되어 나타났다. 우선적 반가움을 표한 유저, 다양성 포용 자체에는 찬성하나 그 방식에서는 비판적인 유저, 모든 다양성 표현에 반감을 지닌 유저 등 여러 유형이 관찰됐다.
<위쳐 4>의 주인공으로 확정된 시릴라
한편 개발사들의 관련 발언에서의 새로운 경향도 눈에 띈다. 이전에 비해 공개적으로 DEI 운동에 관한 부정적 견해를 밝힌 사례들이 포착된다.
대표적으로 <워해머 40,000: 스페이스 마린 2>를 개발한 세이버 인터랙티브 CEO가 있다. 그는 해외 유튜버 ‘아스몬골드’의 영상에 남긴 댓글에서 “한때 엠브레이서 그룹의 COO로 일했는데, 게이머들에게 도덕적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그들의 과장된 시도에 울고 싶었다”고 이야기했다.
해당 댓글이 화제가 되자, 외신 IGN은 세이버 인터랙티브에 접촉해 해당 댓글 작성자가 정말 CEO 자신이 맞는지 문의했다. 세이버 인터랙티브는 이를 긍정하지 않았지만 특별히 부정하지도 않았다.
비슷한 의견을 밝힌 것은 <헬다이버스 2>의 디렉터 요한 필스테드다. 지난 1일, 한 팬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그에게 “앞으로 낼 작품에 절대 DEI를 포함시키지 말라”고 이야기했다. 이에 필스테드는 “게임 경험에 무언가 더해주지 않는 요소라면, 방해가 될 뿐이다. 게임이란 자고로 멋진 순간을 순수하게 추구해야 한다”고 답변을 남겼다.
필스테드의 관련 발언 (출처: 엑스)
글로벌 메이저 개발사 대부분이 논란이나 메시지 곡해의 가능성을 의식해 다양성 이슈에 관해 긍정이든 부정이든 말을 절대 아꼈던 이전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또한 이들 두 기업이 해당 발언 이후 (과거처럼) 모든 게임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거나, 대대적 비판 및 불매 운동, 혹은 반대로 전적인 추종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는 더욱 주목할 만하다. (물론 더 작은 단위에서는 그런 경향이 나타났다)
그러나 큰 그림으로 보면, 글로벌 업계의 다양성 논의는 적어도 한동안 지금까지처럼 지속될 흐름이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인종적, 문화적 통일성이 높은 일본의 경우에도 닌텐도, 반다이남코 등 글로벌 기업들이 최근 몇 년 새 다양성 정책을 전향적으로 수립해 온 것에서 이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다양성에 완전히 반하는 메시지, 가령 ‘차별 옹호’ 등을 내세우는 메이저 기업은 현재로서 없다. 위에 언급된 두 기업도 그러한 범주 안에 있다. 유명 게임 기자 제이슨 슈라이어는 ‘신뢰할 만한 취재원’을 인용, 업계에서 가장 도발적인 시리즈 <GTA> 역시도 올해 나올 작품부터는 소수자에게 모욕적(offensive)인 농담이 줄어들 예정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다만 DEI 기조에 대한 시장 반응과 여론 다각화가 나타난 것은 유저들 쪽만이 아닐 수도 있다. 뚜렷하게 글로벌을 지향한 세이버 인터랙티브, 애로우헤드 등 기업들이 새로운 경향을 보여줬듯, 2025년에는 다른 기업들의 DEI 스탠스 역시 이전보다 ‘스펙트럼화’할 것인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