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은 프레젠테이션이 아니다. 국립국어원은 토론을 "어떤 문제에 대하여 여러 사람이 각각 의견을 말하며 논의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서로 논리와 근거를 갖추고 각자의 의견을 '주고 받아야' 한다. 일방적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상대방의 의견을 (그것이 좋든 나쁘든) 무시해버린다면 그건 토론이 아니다.
지난 22일 방영된 MBC <100분 토론>이 그랬다. 표면상으로 "'게임 중독' 질병인가, 편견인가"라는 부제를 달기는 했지만, 게임에 대한 몰이해와 편견을 전제로 깔아놓고 제작된 '아무말 대잔치'의 쇼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MBC는 둘 중 하나다. 제대로 된 토론을 만들 생각이 없었거나, 그럴 능력이 없을 정도로 이 이슈에 대해서 무지했거나.
# 이미 결론은 내려놓고... <100분 토론>에 '토론'이 없었던 이유
지난 21일, 토론의 본 방송에 앞서 공개된 예고편에서 MBC는 "'게임 중독'은 질병인가?"라는 화두를 던지며, '게임에 방해된다며 한 부모가 생후 2개월 아기를 때려 숨지게 한' 사건, '게임 중독에 걸린 10대가 정신병원에 불을 지르고 탈출했다는' 사건, '게임 아이템을 사려고 차량을 절도한 20대가 구속됐다는' 사건 등. 여러 자극적인 사건들을 먼저 소개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 사건들은 이번에 이슈가 되는 WHO의 '게임 과몰입 질병 코드 분류'와는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없다. "'게임 중독'이 현실 폭력이나 범죄로 이어지는가?"라고 물으려면 우선 "'게임 중독'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해야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MBC 예고편의 메시지는 다음과 같았다.
'게임으로 인한 사회적 문제'가 있는데, '게임 중독'이 문제더라.
그런데 '게임 중독'은 있을까요?
다시 말해 MBC는 "'게임 중독'이 존재하는가?"(그리고 그것은 무엇인가)를 물어야하는 토론의 예고편에서 이미 "'게임 중독'은 존재한다"는 결론이 난 이후의 화두를 맨 앞으로 끌어오고 있었다. 토론을 주최해야하는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벌써 '게임이 문제다'라는 결론을 내놓았으면서, 대체 무슨 토론을 하자고 사람을 불러모은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주류 언론이 '게임은 나쁜 것'이라는 거친 전제하에 게임을 부정적으로 다루는 것은 사실 어제 오늘일이 아니다. 어떤 사건을 알릴 때 그것을 자신의 전략적 의도에 따라 만든 틀(frame) 속에 넣어 제시, 특정한 반응을 유도하는 행위를 프레이밍(framing)이라고 한다. 5월 21일 MBC <100분 토론> 역시 이처럼 이미 짜여진 틀 안에서 펼쳐지는 쇼에 불과했다하면 과한 것일까?
# 게임의 폭력성 실험했던 바로 그 곳, 그리고 새로운 밈(meme)의 탄생
(상대 토론자가 실제 연구결과와 다름을 지적하며 논문을 읽어보았느냐 묻자,)
"일반인은 논문 읽지 않아도 알 수 있어요."
"게임중독은 타인에게 피해를 끼쳐요."
(상대 토론자가 다른 중독도 그렇다고 반박하자, 자기 의견을 스스로 반박하며)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네요?"
- 김윤경 정책국장, 5월 21일 MBC <100분 토론> 중
상기해보면, 당장 몇 년 전 인터넷에서 유명했던 "게임의 폭력성 실험"을 했던 곳도 MBC였다. 이번 <100분 토론>의 경우에도 새로운 밈이 될 법한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발언이 쏟아져 나왔고, 토론 패널이 자신의 논리로 자신을 반박하고 있는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하는 촌극을 연출하면서 훌륭한 '후속작'을 배출한 셈이 됐다.
게임에 익숙한 젊은 층과 대다수 유저들은 당일 토론을 그저 '웃음거리'로 소비하고 있지만, "게임의 폭력성 실험" 때와 달리 MBC가 마땅히 받아야할 비판을 받지 않고 있는 점은 다소 우려되는 부분이다. 이번 '사건'에서 가장 지탄받아야하는 것은 바로 토론 주최자인 MBC이기 때문이다.
우선 이번 토론은 근본적으로 패널 선정에 있어 문제가 있었다. 게임 옹호측 패널은 게임 관련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교수와 현재 산업에서 종사하고 있는 유튜브 크리에이터다. 반면 '중독'측 패널에는 엉뚱하게도 '인터넷스마트폰 과의존 예방 시민연대'라는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는 일반 시민이 있었다.
김윤경 정책국장은 지난 2018년 김포시 학부모 단체를 기반으로 설립된 이 시민단체에서 근무하고 있다.하지만 시민단체에서 몇 년 일했다고 전문가로 보기는 힘들다. 정책국장이라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시민의 입장에서 해당 안건과 문제를 대변하는 자리일 뿐이다.
그 결과 토론의 밸런스가 전혀 맞지 않았다. 만약, MBC가 '일반 시민'의 의견이나 입장을 대변하는 토론자를 배치해 토론의 깊이와 전문성을 희생하는 대신 의견의 외연을 확장하려 했다면, 게임 측 패널에도 게임을 즐기는 일반 시민이나 동호회 회원을 불러왔을 것이다. 그랬다면 토론은 더 격했을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오히려 더 가볍고 일상적인 차원에서 생산적인 담론이 오갔을 수도 있다. 그것은 또 그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MBC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번 토론의 기획 의도에는 전문성도 일상성도 없었다. 대신, 그들이 배치한 논리의 블랙홀이 모든 논의를 집어삼켰다. 김윤경 정책국장은 앞서 소개한 반지성주의적 발언을 비롯해 토론자로서 기본 태도가 문제시될 정도로 강경한 발언을 쏟아냈고, 게임측 패널은 이 발언들을 지적하기 급급했다.
정작 일견을 필요로 하는 의학계 전문가의 발언은 제대로 소개되거나 반박되지 못했고, 이에 대해 깊은 이야기가 오고 가지도 못했던 '게임 중독' 토론. 문제가 되는 패널이 막무가내로 자신의 의견을 쏟아내는, 화제가 될 법한 '막장 토론'. MBC가 의도한 그림이 도대체 어떤 것이었나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묻는다. 이 토론에서, 이번 사건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누구인가? 막장 발언을 쏟아낸 일반인인가, 아니면, 그런 일반인이 나와 전문적인 주제에 대해 막장 발언을 쏟아내게 만든 MBC인가?
# 20년째 바뀌지 않는 낡아빠진 보도 실태, 주류 언론의 '게임 혐오'
사실 이번 <100분 토론>까지 오지 않아도, 게임에 대한 자극적인 보도의 사례를 우리는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었다. 일례로, MBC가 예고편에서 언급하기도 한 "게임 중독자가 게임에 방해된다며 자기 자식을 살해했다"는 사건의 보도 내용을 들여다 보자.
매일경제는 이 사건에 대해 지난 5월 14일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생후 2개월 된 아들이 울고 보챈다는 이유로 평소 온몸을 묶어 학대하고, 끝내 주먹으로 머리를 때려 숨지게 한 혐의로 20대 남성이 구속돼 재판에 넘겨졌다.
(중략)
A씨는 평소 아내와 함께 집에서 컴퓨터 6대를 돌리며 온라인 게임 아이템을 모은 뒤 이를 팔아 그 수익으로 생계를 이어왔다.
A씨는 수천만 원의 대출금으로 채권 추심업체에서 압박을 받는 등 스트레스가 심해지는 상황이 되자, 어린 아들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아들을 돌보면서 게임 아이템을 모으는 작업을 제대로 하지 못해 수입이 줄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 매일경제, "게임 방해된다고…생후 2개월 아들 폭행해 숨지게 한 아빠", 2019.05.14.
이 사건에서 A씨는 정확히 무엇 때문에 아이를 살해했는가? 온라인 게임인가, 채권 추심업체의 압박으로 인한 스트레스인가? A씨는 '게임 중독자'이기 때문에 게임으로 생계를 이어온 것인가, 생계를 잇기 위해 게임을 해온 것인가?
그런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2000년 3월 9일 중앙일보 보도를 보면, 우리는 석연찮은 익숙함과 마주하게 된다.
3개월동안 하루 10시간 이상 컴퓨터 게임에 몰두해온 30대 PC게임방 주인이 게임 도중 쓰러져 숨졌다. (중략)
경찰조사 결과 1년전부터 게임방을 운영해온 金씨는 3개월 전부터 오후 4시쯤 출근해 다음날 오전 9시까지 하루 10시간 넘게 이 게임에 몰두해 왔으며 (중략)
경찰은 평소 건강했던 金씨가 게임에 중독돼 과로와 스트레스가 겹쳐 심장마비로 숨졌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정확한 사인을 조사중이다.
- 중앙일보, "PC게임 중독 30대 심장마비死", 2000.03.09.
거의 20년이 되어가는 이 보도의 문법이 우리는 낯설지 않다. 얼핏 보면 30대 남성이 게임에 '중독'되어 쓰러져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함정이 있다. 바로 김씨가 PC방 사장으로서 오후 4시에 '출근'을 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김씨의 진짜 사인은 무엇인가? 게임(중독)인가, PC방 사장으로서의 업무, 과로와 스트레스인가, 혹은 직접사인인 심장마비는 왜 일어났는가?
무엇하나 인과관계가 확실하지 않은 이 사건들의 내용을 가지고, 수많은 언론사는 "게임이 사회적 문제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자극적 내러티브를 양산해 대중에 20년동안 유포하고 있다. 어떤 사건이나 문제가 발생했는데, 그 원인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게임 때문인 것 같다"는 날림성 논리와 주장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다소 결은 다르지만, 주류 언론의 이와 같이 비윤리적인 보도 실태를 드러내는 중요한 사건은 또 있다. 바로 지난 3월, "뉴질랜드 총기 테러범이 포트나이트로 살인 훈련했다"는 연합뉴스 보도였다.
사람들은 그가 '게임을 하듯' 사람들을 쐈다고 경악했다. 실제로 총격범이 발표한 선언문에는 "비디오 게임인 '포트나이트'(Fortnite)가 나를 킬러로 훈련시켰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포트나이트는 총기로 적들을 공격하는 서바이벌 서바이벌 슈팅 게임으로,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 연합뉴스, "17분 생중계로 '게임하듯' 탕탕탕…모스크 '테러 라이브' 충격", 2019.03.15.
지난 3월 15일, 뉴질랜드 이슬람 사원에서 총기 테러가 일어났다. 테러범은 인터넷에 자신이 작성한 '선언서'(manifesto)를 공개했고, 연합뉴스는 이를 인용하며 위과 같이 썼다. 하지만 이 보도는 오보였다. 해당 내용은 선언서의 일부, 테러범이 자신에게 올 법한 여러 질문에 대해서 '자문자답'한 내용을 발췌한 것이었는데, 원문은 이러했다.
비디오 게임, 음악, 문학, 영화가 당신에게 폭력과 극단주의를 가르쳤습니까?
그렇다. <스파이로 더 드래곤 3>이 나에게 민족주의를 가르쳤다. <포트나이트>는 나를 살인자로 훈련시켰고, 내 적들의 시체 위에서 춤을 추도록 가르쳤다.
<스파이로 더 드래곤>이 '민족주의'를 가르쳤다는 대목이나, 시체 위의 춤이라는 행위부터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다. 사실 해당 답변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 밑에 한 줄이 더 있었기 때문이다.
비디오 게임, 음악, 문학, 영화가 당신에게 폭력과 극단주의를 가르쳤습니까?
그렇다. <스파이로 더 드래곤 3>이 나에게 민족주의를 가르쳤다. <포트나이트>는 나를 살인자로 훈련시켰고, 내 적들의 시체 위에서 춤을 추도록 가르쳤다.
"...그랬겠냐?" (원문은 No.)
테러범의 의도는 비디오 게임을 비롯한 문화 창작물들이 사람들을 폭력적으로 만든다는, 만국 공통의 검증되지 않은 보도를 비꼬는 것이었다. 선언서까지 작성해 공개할 정도의 '신념형 테러리스트'로서 자신의 신념이 매스 미디어에 의해 '조작'됐다고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연합뉴스는 기본적인 팩트체크조차 시도하지 않았거나, 선언서를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기사를 낸 것으로 보인다. 물론 외신 기사를 번역한 기자의 역량 문제라거나 단순한 번역 실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다만 연합뉴스가 기본적으로 이 사건의 '엄중함'에 대해서 제대로 자각하고 있었다면, 이러한 기사는 애초에 나가지 못했을 터이다.
뉴욕 타임즈를 비롯해 수많은 해외 매체들이, 테러범이 이처럼 소셜 미디어 채널을 이용해 자신의 선언을 확산시킨 점(혹은 미디어 트롤링 media trolling)에 대해 진지한 의견을 나누고 있을 때, 연합뉴스는 단순히 화제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검증되지도 않은 기사를 통과시키고 있었다. 연합뉴스의 기사를 송고 받는 수많은 언론사들 역시 이를 그대로 실었다.
해당 연합뉴스 보도는 당일 아침 TV 뉴스에 오를 정도로 화제가 됐다. 물론 명백한 오보였기 때문에 연합뉴스는 나중에 정정보도를 내야했지만, 이미 인터넷에 퍼뜨려진 수많은 연합뉴스발 오보는 수정되지 않았고, 당연히 공식적 사과 역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