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신화: 오공>(이하 오공)은 중국의 게임사이언스가 만든 액션 RPG다. 지금으로부터 딱 1년 전, 독일 게임스컴에서 <오공>의 시연이 이루어진 적 있다. 그때 게임을 체험하기 위한 대기 시간은 무려 300분, 4시간 넘게 이어졌다. 쾰른메쎄에서는 게임스컴 어워드를 석권한 <젤다의 전설: 왕국의 눈물>보다 <오공>이 훨씬 더 많이 회자됐다. (<왕눈>이 이미 출시된 게임이라는 점도 한몫했을 것이다.)
모쪼록 오늘날 게임사이언스의 <오공>이 최고의 화제작이라는 데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은 적을 듯하다. 화려한 트레일러는 뭇 게이머의 이목을 사로잡았지만, 게이머들은 그간 트레일러의 '과다포장'에 적잖이 속아왔다. 더구나 개발사가 모바일게임을 만들던 (국제적으로) 무명에 가까운 중국 게임사였기 때문에 의심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기자 또한 AAA급 액션 RPG가 나올 수 있을지 우려했다. 게임사이언스는 SNS로 적극적인 소통 행보를 펼치는 대신 묵언수행하듯 게임만 개발할 뿐이었다.
기자는 게임 발매일 8일 전인 8월 12일 오후에 <오공>의 리뷰 코드를 전달받았다. 130GB에 달하는 게임을 스팀에 설치하고, 광복절에 집에서 게임을 이어서 하기 위해 스팀덱에 같은 게임을 다시 받은 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시간을 <오공>과 함께 보냈다. 엠바고 해제를 5시간 앞둔 현재, 누적 플레이 시간은 37.3시간이다. (게임은 스팀덱으로 잘 돌아간다.)
줄곹 <오공>을 플레이했으나 실력 부족 탓에 4장에서 게임을 중단했다. 마음 같아선 곧장 최종장까지 달리고 싶지만, 이렇게 기사를 위해서 플레이를 멈추고 소감을 전달하는 것 또한 리뷰어의 숙명일 것이다. <오공>은 걸출한 작품이다. 감히 예측하건대 올 연말 <오공>은 온갖 시상식에 이름을 올릴 것이다. 현란한 트레일러는 게이머의 눈을 현혹하는 요술이 아니었다.
35.7시간까지 플레이한 <오공>은 진짜 제대로 만든 게임이었다. 본 체험기를 읽기 전에, <오공>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미리 파악하고 싶다면 이전 기사들이 조금 도움이 될 듯하다.
<오공>은 스팀덱에서 100% 호환된다. 도킹스테이션과 연결하면 더 큰 화면으로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관련 기사]'검은 신화: 오공', "나는 구매 버튼을 눌렀다" (바로가기)
[알림]
- 본 리뷰는 게임사이언스로부터 리뷰코드(PC/Steam)를 받아 작성됐습니다.- 정식 출시 빌드와 가장 가까운 버전이었지만, 게임 내 콘텐츠는 추후 변경될 수 있습니다.- 본 리뷰에는 <오공>의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게임의 핵심 요소는 주인공이 여러 지역을 활보하면서 그의 길을 막아서는 적들을 곤봉으로 무찌르는 것이다. 3인칭 액션 RPG라는 점에서 장르의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는 <다크 소울>, <엘든 링> 등의 '프롬 소프트웨어 류'와의 비교가 불가피한 듯하다.
<오공>은 '프롬 류'보다 조금 더 가볍고 경쾌한 전투를 지향한다. (35시간 플레이한) 현재까지 오공의 무기는 여의봉이 연상되는 곤봉이 유일한데, 달리면서 기를 충전할 수 있는 벽곤, 곤봉 끝에 서서 지상공격을 일정 부분 무마시키는 입곤, 먼 거리에서 적을 찌를 수 있는 착곤의 전투 타입이 있다. 여러 스타일의 자세를 발전시키고, 또 상황에 따라서 골라 착용하는 재미가 있다. 이 과정에서 다채로운 손맛을 즐길 수 있었다.
입곤을 사용하면 지상공격을 일정 부분 피할 수 있다.
방어 옵션은 구르기가 대표적이다. 구르기의 타이밍이 완벽하게 맞으면 슬로우모션이 걸리면서 곧바로 딜을 먹일 수 있다. 완벽한 타이밍이 걸리면 강력한 보스의 공격까지 구르기로 피할 수 있으며, 시전 시간 동안에는 무적이 걸린다. <다크 소울> 시리즈처럼 소지하고 있는 아이템의 무게의 영향을 받지는 않는다. <오공>에는 무게 제한이 없다.
그렇다면 대표적인 방어 옵션인 패링에 대한 갈증이 생기는데, 개발진은 '패링이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하는 시점에 패링을 지원한다. 극초반부에는 패링을 할 수 없고, '바위 육신'이라는 방어 체술을 배워야 지만 패링을 할 수 있다. 바위 육신으로 공격을 막으면 그 뒤에 번쩍이는 이펙트가 나타나면서 적이 뒤로 물러난다. 이때의 스턴을 이용해 적에게 스킬을 날리는 방식이다.
<오공>에는 <엘든 링>처럼 다양한 스킬이 있다. 기본 공격인 봉술 이외에 묘술, 잔털(분신술), 그리고 변신이 존재한다. NPC에서 구매하거나 필드에서 줍는 게 아니다. 특정 조건을 가진 보스를 깨거나 레벨업에 따른 스킬포인트를 통해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강화하게 된다. 스킬 트리는 게임의 세이브포인트에 해당하는 사당에서 초기화한 뒤, 다시 올릴 수 있다. <오공>의 유연성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묘술은 상대의 움직임을 정지시키는 정지술과 마법진을 그려 기력을 회복하는 인식술이 있고, 잔털은 <서유기>에서부터 내려오는 주인공의 분신술이다. 변신은 아예 그간 잡은 보스 중 일부의 몸으로 둔갑해 그 보스의 기술을 쓰는 것이다. 첫 보스 광지를 잡으면, 광지로 변신할 수 있는 기술을 획득하는데, 자신의 신력을 소모해 특정 기간동안 다른 캐릭터를 조작할 수 있다.
첫 번째 보스 광지를 잡으면 광지로 변신하는 스킬을 얻게 된다.
분신술은 꽤 많은 포인트를 요구하지만, 적재적소에 쓰면 보스를 쉽게 끝장낼 수 있다.
<오공>은 세분화된 마나포인트(MP) 기능을 가지고 있다.
달리고 뛰고 일반공격(봉술)에는 기력이 사용되며, 적 얼리기(정지술)와 마법진 소환(안식술)에는 법력이 쓰인다. 다른 캐릭터로 변신하는 데에는 신력이 소모된다. 모든 스킬을 난무하는 방식으로 스테이지를 돌파하다가는, 회복약이 없는 상황에서 애를 먹을 수 있다. 게임을 진행함에 따라서 더 좋은 회복약을 만들어 쓸 수 있다. 상점에서도 일정 양의 회복약을 판매한다.
정리하자면 <오공>은 기본 공격 무기가 곤봉으로 한정된 대신, 그 곤봉의 자세를 통한 변주와 대단히 많은 스킬 옵션의 조합을 추구한다.
게임의 스킬트리는 세분화되어 있으며, 사당에서 초기화할 수 있다.
단순히 선형적으로 보스만 깨러 가는 게임처럼 보였다가도 돌아가서 맵 이곳저곳을 탐험하게 만든다.
그렇게 보정치를 얻고 보스를 쉽게 잡는 구조다.
<오공>이 이토록 많은 관심을 받았던 이유는, 게임이 '소울라이크'처럼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게이머로 하여금 '매운맛'을 느끼게 하는 액션 어드벤처 게임 부류는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다. 절륜한 곤봉술을 선보이는 <오공> 트레일러를 본 게이머들의 시선에는 소울라이크로서의 <오공>에 대한 기대가 섞여 있었다.
기자는 '프롬 류' 또는 소울라이크라면 젬병이다. 명색이 게임기자인데 '나름' 게임 좀 한다고 젠체하던 시절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제 더는 무리다. 기자는 에이징커브를 겪은 뒤 '빡겜러'에서 '즐겜러'가 됐다. 지금 기자가 게임을 얼마나 못하는지는 정식 출시 이후, 플레이타임(37시간)과 진척도(4장까지)를 보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게임이 나온 뒤에 기자를 놀리러 이 글을 다시 방문하셔도 좋다.
기자를 포함한 뭇 리뷰어에게는 <오공>에 대해서 아는 척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다. 하지만 반대로 대략 나흘동안은 기자 말에는 대략의 권위가 생긴다. 이 기간제 권위에 빌어 평가하자면, <오공>은 소울라이크라는 분류에 오롯이 들어가지 않는다. <오공>은 <오공>이라고 부르는 게 옳다. <오공>은 '프롬 류'를 기준 삼아 스코빌지수처럼 매운맛의 척도를 매길 수 없다는 것이다.
이 NPC는 굉장히 자주 보이는데, 꽤 귀찮은 녀석이다. 과연 이 NPC가 저팔계일까? 아니면 다른 모습의 저팔계가 등장할까?
그럼에도 프롬 소프트웨어가 장르에 큰 획을 그었기 때문에, 그 영향을 일절 받지 않았다고 쓰는 것은 무리다. 이를테면, 지하감옥인 '부도계'에서는 코너를 돌 때 적이 나와서 낙사를 유도하는 류의 장면이 많이 나왔다. 하지만 플레이어는 그런 길을 피해서 움직일 수도 있다. 게임은 갈 수 있는 길, 갈 수 없는 길, 지름길과 우회로를 꽤 선명하게 알려주고 있고, 동선만 파악하면 잡몹은 피하고 보스만 공략하는 타입의 보스러시도 가능하다.
스토리 진행을 위한 보스전을 제외한 모든 전투가 강제되지 않는 것인데, HP(체력)의 회복판정이 대단히 널널한 편이기 때문에 게임 내내 '어려워서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주인공 캐릭터는 호리병에 든 술을 5번에서 7번씩 마시면서 체력을 40% 이상 채울 수 있다. 체력 게이지가 널널하다 보니 패턴만 잘 읽으면 한 번에 깨는 보스몬스터도 있을 정도였다.
기자가 가장 많은 시간을 쏟아부은 부스는 2장의 최종보스인 '황풍대성'이었다. <서유기>의 황풍대왕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다. 모래바람을 일으켜 시야를 교란시킨 뒤 강력한 공격기로 플레이어를 쓰러뜨리는 보스였다. 도전이 막히자 2장의 배경인 황풍령 이곳 저곳을 돌며 숨겨진 공간을 찾고, 감춰졌던 중간보스를 잡아서 버프를 얻고, 강화를 위한 여러 기능을 찾아내고, 장신구를 줍고, 레벨업으로 스킬포인트를 찍으면서 강해졌고, 끝내 보스를 제압했다.
지하감옥에서는 <다크 소울>적 맵 디자인을 만날 수 있다. 외나무다리가 있고, 앞에는 궁수가 버티고 있다든지, 보이지 않는 곳에 다른 적이 숨어있다든지...
황풍대성 공략에 애를 먹었지만, 여러 공간을 탐험하면서 강해지고, 결국 클리어했다.
이렇듯 <오공>의 레벨 디자인과 맵 디자인은 소울라이크에 친숙하지 않은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흥미를 느끼고 도전을 이어갈 만한 요소로 가득하다. 중요한 구간에는 어김없이 세이브포인트에 해당하는 사당이 있고, 그곳에서 물약을 조제하거나 상점을 이용하는 한편, 스킬트리를 새로 찍을 수도 있다. 특수한 업그레이드나 퀘스트를 제외하고는 사당에서 전부 해결된다. 참고로 <오공>에는 적지 않은 서브퀘스트가 존재하지만, 게임 상에서 DB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주어진 대사를 꼼꼼하게 읽어야 한다.
숲, 사막, 설산 등등 언리얼엔진5로 빚은 풍광을 탐험하는 묘미가 훌륭했다. 여러 공간에는 저마다의 특색도 있었고, 어떤 위치에 앉아 좌선을 하면 스킬포인트를 얻기도 한다. <고스트 오브 쓰시마>에서 온천을 하면 사카이 진의 HP가 증가하는데 이것보다 더 많은 혜택을 주는 셈이다. 이 포인트를 찾으려 가는 길도 지루하지 않도록 적 NPC와 보물 상자가 적재적소에 뿌려져 있다. 탐험 요소를 극대화하기 위함인지, <오공>에는 미니맵이 없다.
아직 8월 중순이고, 남은 한 해 걸출한 게임들이 많이 출시되겠지만, <오공>에는 특별히 '올해의 게임 디자인'을 주고 싶다. 앞서 '패링이 필요할 때 패링을 준다'는 설명을 했는데, 그런 재미가 게임 곳곳에 널려있다. 오는 8월 20일 게이머들은 이 맛을 천천히 음미하길 권한다.
사당에서는 저장은 물론 여러 활동들을 할 수 있다. 특수한 업그레이드를 할 때에만 다른 지역에 가면 된다.
곳곳에 숨어있는 보물상자를 놓치지 마시라.
좌선을 하면 스킬포인트를 얻을 수 있다.
<오공>의 그래픽과 사운드는 게임사이언스의 첫 작품이라고 믿기 어려울 수준이다. 이뿐 아니라 엠바고 때문에 자세히 언급하지는 못하지만, <오공>에서는 각 장을 클리어할 때마다 깜짝 놀랄 만한 선물이 2개 있다.
둘 다 플레이어로 하여금 엄청난 미적 만족도를 선사하는데, 하나는 짧은 애니메이션이고 다른 하나는 게임의 스토리를 소재로 한 불화(佛畵) 퍼즐이다. 특히 애니메이션의 스타일은 장마다 달랐는데, 과장 조금 보태서 지브리가 떠오르는 수준의 작품도 있었다. <오공> 공식 유튜브에서 이들이 시도한 애니메이션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스토리에 대해서도 자세한 언급은 피해야 한다. <오공>은 중국 고전 <서유기>의 세계를 재창조했다. 500년 전 불경을 구하기 위해 갔던 일행은 사라졌고, 과거의 손오공은 투전승불이 된 것이 아닌 가짜 손오공이었다는 사실이 들통난다. 이에 주인공은 대를 잇는 '천명자'가 되어 과거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은 여러 인물들을 만나고, 문제를 해결해 준다. 플레이를 이어가다 보면 <서유기>의 대표적인 캐릭터들을 동료, 또는 적으로 마주하게 된다. <서유기>를 모르면 다소 복잡할 수 있겠지만, 예부터 <날아라 슈퍼보드>를 애청한 우리 한국인이라면 <오공>을 흘러가는대로 즐길 수 있다.
이쯤에서 강조하고 싶은 점은 게임 번역이 수준급이기 때문에 몰입이 깨지는 일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기자가 받은 빌드에는 각 몬스터에 대한 도감이 번역이 덜 되어있는 부분이 있었지만, 게임 내에서의 번역은 완벽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지금까지는 살짝 이야기가 중구난방 난잡하다는 인상이 있었는데, 도감 콘텐츠로 정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대만의 <나인 솔즈>가 아쉬운 번역 퀄리티를 보여주었고, <활협전> 유저 번역이 한국어의 존댓말과 반말을 구분하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주목할 만한 성과다. 한시나 중국 고전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사람이 감수한 것처럼 보였다.
<오공>은 여러모로 한눈 팔기 좋은 게임이다.
<오공>에는 81개의 도전과제가 있고, 기자는 그중 21개의 트로피를 획득했다. 게임 이야기의 1/4을 만났다고 가정한다면, <오공>의 플레이타임은 대략 100시간 이상이 될 것으로 추측한다. 게임에는 진귀한 유물이 여럿 있고, 60%를 모았는데 이 유물을 전부 모으는 것으로 게임이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이 든다. 어차피 오공은 절대로 죽지 않는 존재이니 다회차 요소에 대한 기대도 있다. 모호한 설명이지만, 양해를 바란다.
지난 설날, <오공> 개발진은 13분 분량의 엉뚱한 영상을 내놓았다. 게임 트레일러가 아닌 단편영화로 한 커플이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갔다가 쿠사리를 먹는 내용으로, 남자는 심드렁한 태도를 보이지만 부모는 아들의 성격과 행동을 전부 닦달한다. 여자는 그런 남자가 "지금 모습 그대로가 좋다"며 변호하고, 출근하겠다며 떠난 여자는 원숭이를 찾아서 먹이를 주면서 영화가 끝난다.
엉뚱한 영상은 플레이어에게 보내는 일종의 은유로 읽을 수 있다. 부모는 <오공>에 투자한 투자사들, 여자친구는 플레이어, 남자는 게임사이언스라고 볼 수 있다. 투자사는 게임사이언스를 닦달하면서 결과물을 요구하지만, 플레이어는 게임사이언스를 믿고 기다림의 시간을 가졌다. 지난 2월 공개된 영상은 그 고집의 결과가 조만간 공개될 테니 기다려달라는 내용이었다.
적어도 기자의 기다림은 헛되지 않았다. 게임사이언스의 변하지 않는 고집은 AAA급 액션 RPG <오공>을 빚어냈다. 정식 출시 이후에도 <오공>의 세계를 더 깊이 다룰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때는 기자가 행자가 되어 독자 여러분의 가르침을 받으리라.
단편영화의 마지막에는 게임사이언스의 "고집"에 대한 각오가 나타난다.
이륙허가! 이륙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