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인크래프트>의 흥행 이후 국내 개발자들 사이에서도 인디게임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기 시작했다. 거대 자본으로부터 독립해 자신의 아이디어를 구현하고 인정받는다는 것은 모든 개발자의 꿈일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도 많은 개발자들이 청운의 꿈을 품고 인디게임을 만들고 있다.
하지만 정해진 프로세스, 그리고 월급이라는 절대목표(?)가 있는 상업개발과 달리, 인디게임 개발은 유독 프로젝트의 중도 포기가 많다. 어떤 사람은 이를 의지의 문제라고도 하고, 또 다른 이는 열악한 환경의 문제라고도 한다. 하지만 인디게임 개발 10년 차에 접어든 원창현 씨가 보기에는 개발자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파악하지 못하는 게 더 큰 문제다.
25일 넥슨 개발자 컨퍼런스(NDC)에서 진행된 원창현 씨의 ‘인디게임 포기하지 않기’ 강연을 들어 보자. /디스이즈게임 김승현 기자
인디게임 개발자 원창현
■ 2D 비행슈팅을 만들면 RTS를 잘 만들 수 있을까?
“한 인디게임 개발자가 있습니다. 어느 날 원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린 그는 게임의 핵심매력을 꼼꼼하게 정리한 뒤 거짓말처럼 프로젝트를 포기했습니다. 조금 더 준비해서, 나중에 더 많은 이들과 함께 개발하기 위함이라는 것이 그가 내세운 이유였습니다.”
원창현 개발자는 이러한 사례를 ‘대작병’이라는 한마디로 정의했다. 개발자라면 누구나 방대한 콘텐츠, 복잡한 스토리, 실사 같은 그래픽으로 이루어진 대작을 꿈꾼다. 하지만 이러한 원대한 아이디어는 곧 방대한 개발분량을 의미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인디게임 개발자는 이를 이기지 못하고 중도에 프로젝트를 접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핵심에 집중하라’, ‘작게 시작하라’는 조언이 나온 것이다.
원창현 개발자 주변에도 경험을 쌓기 위해 첫 프로젝트를 간단한 게임으로 시작하는 이가 많이 있다. 그런데 쉽고 간단한 게임을 만들면 인디게임 개발이 수월할까? 의외로 적지 않은 이들이 연습 삼아 시작한 작은 프로젝트에서도 좌절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이 말하는 가장 큰 이유는 스스로에 대한 의문과 자괴감이었다. “나는 겨우 이거 하나를 만들려고 몇 년 동안 프로그래밍을 배운 걸까?”
연습용 프로젝트가 틀린 것은 아니다. 자신이나 팀의 역량을 파악하고 경험을 쌓는 데 이보다 좋은 것도 없다. 문제는 연습용 프로젝트의 대상으로 선정한 장르다. 만약 RTS를 만들려는 이가 2D 비행슈팅게임을 연습대상으로 삼았다면 어떤 유의미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
원창현 개발자는 처음 인디게임 개발을 시도하는 이들에게 “먼저 자신이 최종 목표로 하는 게임의 핵심 메카닉스를 선정해, 이를 바탕으로 프로젝트를 시작할 것”을 권했다.
메카닉스란 ‘시스템’으로서 게임을 설명하는 규칙과 개념을 뜻한다. <스타크래프트 2>의 메카닉스라면 유닛 특성을 살린 전략전투, 실시간 전투와 화려한 전장 연출, 자원채취와 유닛 생산 관리, 건물의 위치 선정과 관리, 미션 보상 포인트를 통한 성장요소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중 하나의 핵심 메카닉스를 선택한다면 전투의 기본이 되는 ‘유닛 특성을 살린 전략전투’일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2D 비행슈팅 게임을 만든다고 이러한 메카닉스를 연습할 수 있을까? 만약 RTS를 목표로 하는 개발자라면 오히려 장기나 체스 같은 보드게임을 개발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유닛 특성을 살린 전략전투’라는 핵심 메카닉스는 같기 때문에 RTS를 만들 때도 도움이 되고, 이로 인해 연습용 프로젝트를 실행할 때도 확실한 목적성이 생긴다.
결국 개발자는 작은 연습용 프로젝트라도 자신이 만들고 싶은 게임의 연장선으로 생각하고 고려해야만 인디게임 개발을 성공적으로 시작할 수 있다.
■ 무엇이 재미를 결정하는가? 장면 대신 메카닉스
“프로그래밍을 배운 이라면 한번쯤 머릿속에 매력적인 플레이 장면이 떠오르고, 이를 위해 구상장면의 핵심기능까지 단숨에 완성한 경험이 대부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도 개발을 계속한 분이 계신가요?”
원창현 개발자의 질문에 손을 든 청중은 극소수였다. 그는 이를 개발자들이 빠지는 전형적인 함정이라고 말했다. 설사 의지력으로 프로젝트를 이어간다고 하더라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 원창현 개발자만 하더라도 어떻게 하면 재미있을까 고민하고 추가하고 고치고 빼느라 1년 넘게 게임을 난도질했다. 나중에 이르러서는 프로젝트의 방향성도 희미해지고, 결국은 익숙한 메카닉스로 얼렁뚱땅 게임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문제의 원인은 즉흥적으로 떠오른 이미지 자체였다. 머릿속에 떠오른 플레이 영상은 게임의 연출일 뿐이고, 그 속에 게임의 핵심 메카닉스에 대한 정의가 빠져 있었다. 결국 게임이 게임으로서 성립하기 위한 목표가 자체가 불명확했던 셈이다.
원창현 개발자는 이러한 즉흥적 개발을 막기 위해 충분한 프로토타이핑을 거치라고 조언했다. 프로토타입을 만든다고 해서 거창할 필요는 없다. 개발새발 그린 이미지로 대충 게임을 만들어도 되고, 종이나 말판으로 보드게임 방식의 프로토타입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아날로그 재료를 이용한 프로토타이핑이 즉흥적인 이미지로 들뜬 머리를 가라앉히기 좋을 때도 많다. 밋밋한 종이와 말판 등으로 모든 것이 표현되기 때문에 화려한 연출은 처음부터 배제된다. 결국 프로토타입 위에는 게임의 핵심 요소만 알몸으로 드러나 있다. 이런 식으로 프로토타입을 만들면서 몇 차례 게임을 완주하면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디자인 오류나 개발팀의 역량을 집중해야 할 승부처가 보이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가장 유의해야 할 것은 실험목적을 꾸준히 확인하는 것이다. 목적이 불분명하면 프로토타입을 플레이해도 문제점이나 개선점을 파악할 수 없다.
■ 게임이 재미있는 만큼, 개발도 재미있어야 한다
원창현 개발자는 한 사례를 이야기했다. 게임의 방향과 핵심 메카닉스가 구체적으로 정의돼 있고, 몇 번의 프로토타이핑을 통해 게임성에 대한 검증이 끝난 프로젝트가 하나 있다. 개발을 위해 모인 이들은 모두 개발자로서 절정기에 다다른 사람들. 과연 이 프로젝트가 성공할 수 있을까?
정답은 알 수 없다. 개발을 담당하는 이가 자신이 맡은 직무를 성실히 수행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개발자의 성실성이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개발자의 개발성향과 게임의 성격이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아티스트라고 해도 평소 귀여운 그림체를 좋아하는 이가 실사풍 그림을 맡는다면 좋은 결과가 나오기 힘들 것이다. 이러한 일은 월급 등에 덜 구애받는 인디게임 개발영역에서 자주 일어난다.
원창현 개발자는 재미있는 게임을 만드는 것 못지않게, 재미있게 게임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가 생각하는 인디게임 개발자의 덕목은 개발자 스스로도 개발을 즐길 수 있는 것이었다.
“어떤 개발자든 한 번쯤 ‘이런 게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인디게임 개발자는 이런 마음 하나를 붙잡고 신규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죠.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은 개발자가 하고 싶은 게임과 만들고 싶은 게임이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개발성향을 알아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원창현 개발자는 프로토타이밍을 통한 개발과정 시뮬레이션을 추천했다. 프로토타이핑을 통해 사전에 개발을 체험함으로써 자신이 어떤 성향의 개발자인지 파악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최근 개발한 슈팅게임 <마녀가 사는 마을>을 프로토타이핑하며 웨이브 형식의 게임에 질색하는 자신의 개발성향을 발견했다. 그는 한 달 넘게 애써도 도저히 개발진도가 나가지 않았던 당시 상황을 돌아보며 그것이 실제 개발이었더면 쉽게 개발방향도 전환하지 못하고 속만 끓였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물론 성향에 맞지 않는 게임인데도 꼭 만들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 개발자에게는 몇 가지 선택지가 주어진다. 다른 동료를 영입하거나 게임 디자인을 수정해 마음에 들지 않는 제작과정을 변경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하지만 그보다 선행돼야 할 것은 자신에 대한 성찰이다.
“혹시 게임이 재미있을 것 같아서가 아니라, ‘XX를 만든 사람’이라는 명함이 필요한 것은 아닌가요? 어설픈 명예욕은 개발자에게나 유저에게나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뿐입니다.”
원창현 개발자는 마지막으로 게임에 있어 재미가 갖는 가치를 강조했다.
“재미있는 개발은 재미있는 게임으로 이어집니다. 부디 오늘의 강연이 재미있는 개발에 도움이 되었기를 바라며 앞으로도 재미있는 개발을 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