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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칼럼] 불친절함과 재미는 공존할 수 있는가?

벽을 허문 턴제, 낯섦을 설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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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준(음주도치) 2024-03-11 18:33:17

약 8년 전, 대학 강의 중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자유롭게 오가던 때였다. FPS(<서든어택>이었던 것으로 기억난다)를 즐긴다던 한 남학생이 "슈팅 게임도 실력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서로의 수를 예측하고 반응하는 턴제 게임에 가까워진다"는 인상적인 말을 했다. 곱씹어볼수록 동감한다. 생물학적 반응 속도를 감안하면, 슈팅 게임의 교전 상황도 매우 빠른 턴제의 느낌일 때가 종종 있다.


한편, 혹자는 '턴제 게임'에 호불호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성격 급한 사람들은 느린 진행 속도에 답답함을 느끼고, 피지컬 개입 요소가 적​으며, 올드한(익숙한) 전투 구성을 반복적으로 진행하는 점 등이 아쉽다는 것. 특히 상대 턴을 기다리는 동안의 루즈함이 치명적인 단점으로 언급되곤 한다. 하지만 턴제 게임 마니아로서 이런 의견들엔 쉽사리 동의하기 어렵다. 이를 극복한 사례도 굉장히 많기 때문이다.


흥행작이 쏟아져 나온 2024년 1분기, 기자의 수면 시간까지 빼앗아가며 마음을 사로잡은 게임은 <팰월드>나 <헬다이버스 2>가 아닌 의외의 타이틀이었다. <명일방주>로 유명한 하이퍼그리프의 <엑스 아스트리스>와 페루 리마에 위치한 개발사 리프 게임 스튜디오의 <다이스포크>가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엑스 아스트리스>와 <다이스포크>에는 크게 3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턴제의 경계를 허문 전투, 설정에 대한 집요함, 그리고 불친절함. 2월 27일에 출시된 두 게임을 즐기는 내내 고민이 이어졌다. 불친절한 게임에 긍정적인 평가를 주는 것이 게임 기자로서 올바른 판단일까? 그런 동시에 왜 이 게임들에게서 참신함과 재미를 느낀 것일까? 과장을 조금 보태면 두 게임을 통해 장르의 격변을 목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엑스 아스트리스>

<다이스포크>


# 턴제엔 피지컬 요소와 긴박함이 없다고? 천만에!

<슈퍼 마리오 RPG>, <씨 오브 스타즈>와 같은 게임을 해본 사람들이라면 턴제 사이에 녹아든 '액션 커맨드'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타이밍에 맞춰 누르는 것으로 콤보를 늘리거나, 패링으로 방어를 하는 방식이었다. 두 게임이 턴제에 액션을 소량 첨가한 느낌이라면, <엑스 아스트리스>는 리듬감 있는 액션 게임에 턴제를 끼얹은 느낌에 가깝다. 그만큼 '액션'이 매우 강조된 게임이다.


먼저, <엑스 아스트리스>의 전투에는 <세키로>의 체간과 유사한 '균형'(체력 이외의 방어)이 있다. 적의 균형 게이지를 완전히 파괴하면 보너스 타임이 적용되며, 보너스 타임이 끝나기 전까지 횟수 제한 없이 적을 공격할 수 있다. 개념적으로는 조금 다르지만 시간이 느려지는 듯한 연출에서는 <베요네타> 시리즈의 '위치 타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균형'을 깨트릴 때까지의 공격은 '행동력'에 제약을 받는데, 이때 중요하게 등장하는 개념이 기술 연계다. 파티 3명의 스킬 중 선공 스킬을 가장 먼저 사용하거나 '띄우기' 이후에 '공중 추격', '추락' 이후 '넘어진 상태 추격'을 연달아 사용하는 등 조건에 맞춰서 콤보를 구사하면, 적은 행동력으로도 긴 콤보를 이어갈 수 있다. 격투 게임 <철권>의 콤보가 생각나는 스타일이다.


방어 턴에도 패링에 해당하는 '옵스큐란 매뉴버'가 있다. 패링에 성공하면 라일라 에너지(필살기 게이지)를 충전하거나, 적에게 '균형' 피해를 주는 등 체력 유지 외에도 유리한 공격 기회를 가져올 수 있다. 


문제는 타이밍이다. 게임 초반에는 적의 공격을 보고 반응해도 패링에 실패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며, 올바른 스킬 콤보 순서로 연계를 해도 적이 띄워지거나, 넘어진 순간을 정확히 포착하지 못하면 기술이 적중하지 않는다. 짧고 긴 박자 외에도 엇박도 존재해 리듬 게임 플레이에 가까운 수준이다. 동시에 이를 마스터했을 때의 쾌감도 그만큼 크다.


'옵스큐란 매뉴버'(패링) 성공 장면

선공 스킬을 비롯해 띄우기와 공중 추격, 추락과 넘어진 상태 추격 등 
개별 스킬의 시작과 끝에 대한 설명을 잘 보고 콤보를 짜야 한다.

보너스 타임 사이의 무한 콤보. 대신 보너스 타임 길이에 제한이 있다.

<엑스 아스트리스>의 전투는 처음에는 적응하기 어려웠지만, 이런 게임이 또 있었나 싶을 정도로 재밌었다. 턴제 게임을 굉장히 많이 플레이한 기자 본인에게도 낯설다고 느껴질 만큼 독특한 디테일도 많았다.


예를 들어, 스킬 배치 슬롯에 해당하는 두 가지 모드로 '웨이브'와 '파티클'이 등장한다.(양자역학의 입자와 파동 상태에서 착안한 작명이다) 캐릭터마다 스킬 배치 개수가 다른 두 모드에 적절한 콤보를 배치하는 것에서부터 <엑스 아스트리스>의 전투에 대한 이해가 시작된다. 스킬 콤보가 생명인 게임이기 때문에 슬롯 개수의 차이가 주는 영향이 굉장히 크다.


캐릭터마다 완전히 다른 전투 체계를 가진 점도 눈에 띈다. '레이'는 파티원이 공격할 때 자동으로 '어시스트'를 해 공격을 돕거나, 활력(체력)을 회복해주고, 스킬을 직접 사용하면 '액티브' 스킬로 더 강력한 상호작용을 보여줬다. '디터런트'는 자신을 포함한 파티원이 스킬을 발동할 때마다 재료를 모아 '워해머'와 '클레이모어'​ 같은 각기 다른 무기를 제작하고, 이때 공격 효과가 변한다. 


게임의 이름에도 등장하는 '아스트리스'를 모으면 캐릭터 성장 트리를 선택할 수 있는데, 이때 등장하는 활성 효과도 캐릭터마다 극명하게 다르다. '디터런트'는 다른 무기를 제작할 때마다 치명 확률이 높아지게 만들 수 있고, 주인공 '비'는 치명타 확률 변동에 의존하는 방식이 주로 등장한다. '옌'은 '아스트롬'이라는 별도의 카운트를 '함영/축영' 루트에 따라 사용해 행동력 및 추가 공격에 대한 다른 이점을 얻는다.


정리하자면, 캐릭터의 개성도 강하고, 하나의 캐릭터로 성장할 수 있는 루트 선택도 열려 있는데, 파티 구성 및 스킬 조합까지 복잡하게 얽혀, 게임 시스템 이해에 대한 허들이 높다. 피지컬+뇌지컬 모두 요구하는 셈이다. 이후 더 자세히 기술하겠지만, 한 번 빠져들면 헤어나올 수 없는 재미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의도적' 불친절함 때문에 전투에 완전히 녹아들게 만드는 속도가 느린 편에 속하는 게임이다. 


파티 조합, 스킬 콤보 구성에 따라 전투 양상이 완전히 달라진다.


하나의 캐릭터 안에서도 성장 루트를 선택할 수 있어 전략의 유동성이 크다.
 

필살기 사용 장면. 캐릭터들이 어느 정도 성장한 후반부에는 한 턴 안에도 필살기-콤보-필살기 구성으로 공격하거나, 
방어 턴에도 역공하는 상황이 자주 등장한다. 손이 매우 바쁜 게임이다.

# 너의 행동도 내가 정한다

주사위를 굴려 전투를 진행하는 <다이스포크>는 더욱 기이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아군과 적은 주사위 3개를 굴려 '윗면'에 해당하는 공격, 방어, 회전(이동) 등의 행동을 소모한다. 플레이어는 아군 뿐만 아니라 적의 행동을 실행하는 순서까지 선택하게 되며, '턴 종료' 조건은 적의 행동이 모두 소모됐을 때다.(아군 행동은 모두 소모하지 않아도 턴을 마칠 수 있다.)


예를 들어, 적의 주사위에서 공격이 나왔다면, 아군 리더(3마리 중 제일 전면에 있는 캐릭터)로 방어를 먼저하고, 적의 공격을 실행해 그 공격을 막아내는 방식이다. 그래서 실행 순서가 매우 중요하다. 내 주사위에서 방어가 나오지 않았다면, 아군은 체력이 높은 캐릭터를 전면에 세우고, 적은 공격력이 낮은 캐릭터를 전면에 나오게 이동해야 한다.


적의 행동을 모두 소진해야 턴이 끝나는 게임이라니, 선택 대상만 놓고 보면 마치 주객이 전도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상대 턴 한 번, 내 턴 한 번이라는 공식을 과감하게 깨부순 것이다.


빨간 상자로 강조한 적의 행동(주사위 면)을 모두 소진해야 턴이 끝난다.
노란 상자 자리(전면)에 있는 캐릭터들이 리더.
파란 상자로 강조한 부분이 각 키메라의 공격력에 해당한다.

<다이스포크> 또한 깊이 파고들면 꽤나 복잡한 게임에 속한다. 일단 가장 먼저 등장하는 변수는 확률이다. 게임을 진행하며 주사위 면에 배치된 행동을 변경할 수는 있지만, 원하는 때에 원하는 면(행동)이 나와주리라는 보장은 없다. 리더를 교체하는 것에 해당하는 회전(이동)은 방향이 무작위일 때도 있고, 공격 및 체력 회복 대상이 랜덤인 행동도 있다. 매번 유동적으로 상황 판단을 해야 한다.


로그라이크 게임이기 때문에 영입할 수 있는 '키메라'(캐릭터) 및 얻는 '장비'도 매 도전마다 다른 편에 속한다. 각각의 키메라마다 고유 특성이 다르고, 전략에 맞는 장비를 지니게 하면 완전히 다른 전투 스타일을 활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최대 체력이 아닐 때 자동으로 공격하는 키메라와 스스로에게 피해를 주는(또는 회복하는) 장비를 조합하면, 주사위에서 공격 행동이 나와주지 않아도 빠른 템포의 전략을 활용할 수 있다. 리더가 되거나, 리더 자리에서 벗어났을 때 발동되는 효과도 있고, 배치가 변할 때마다 적에게 피해를 주는 장비도 있어서 이동을 잘 활용하는 게 중요한 덱도 있다.


주사위 면(행동)을 변경하거나

키메라 영입 및 장비 세팅을 적절히 해주는 것으로 확률이라는 변수 앞에서도 전략을 선택할 수 있다.

# 집요함과 불친절함 그걸 넘어서는 의도

<다이스포크>의 '키메라' 팀 배틀이라는 콘셉트는 <포켓몬스터>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로그라이크 전투 및 스테이지 진행에 초점을 맞춘 구성을 띄고 있지만, 게임의 '도감'에 들어가 보면 그 디테일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해당 키메라가 사람 크기와 비교해서 어느 정도 사이즈인지, 몸무게와 키는 어느 정도인지, 전투에 활용되는 고유 특성과 부가적인 설정은 무엇인지, 심지어 울음소리도 모두 등록되어 있다. 키메라의 종류도 많은 편이고 반복 플레이를 통해 계속 새로운 키메라를 해금할 수 있는 구조다.


반면, 전투 시스템 이해에 필요한 고유명사가 너무 많아 복잡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얽힘, 가시, 혼란, 출혈 등 설명을 매우 꼼꼼히 읽거나, 직접 몸으로 체득하지 않는 한 실제 적용되는 효과가 무엇인지 인지하기 어려운 특성도 많았다. 하지만 변수의 다양성으로 반복 플레이를 지루하지 않게 만든 덕분에, 이런 특징들도 '알아가고 싶은' 요소로 만든 점이 눈에 띄었다.


기대한 것보다 훨씬 디테일했던 <다이스포크> 도감

<엑스 아스트리스>도 마찬가지다. <붕괴: 스타레일>을 비롯해 최근 출시된 중국 게임 전반에 걸친 특징인 고유명사 남용, 과도하게 복잡한 설정, 필드 및 시스템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는 긴 텍스트 등이 문턱으로 작용했다. 한국어 텍스트 번역이 중국어 음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일본어 더빙과 대사나 호흡이 달라 '현지화'가 미흡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사실 지스타 2023 현장에서 짧게 만나 본 <엑스 아스트리스>의 첫인상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시스템 및 스토리의 깊이를 알아 보기엔 10~15분 내외의 시연은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었고, 이 게임은 플레이어가 재미의 핵심에 발을 들일 때까지 낯선 세계를 소개하는 데 힘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엑스 아스트리스>의 세계는 '의도된' 불친절함 속에서 완성됐다. 외계의 행성에 발을 들인 지구인이라는 설정은 사이드 캐릭터들이 (개발사가 만든) 외계의 언어를 사용하는 환경으로 설득했다. 노아의 방주나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로부터 모티프를 얻은 다분히 종교적인 연출들은, SF와 심령(환상) 사이를 절묘하게 오가는 독특한 구성으로 플레이어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한 번 빠져들고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걸리지만, 그 시스템 안에 들어서면 확실한 재미를 주는 게임.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게임. 기자는 <엑스 아스트리스>와 <다이스포크>의 시도를 높이 사고 싶다. 두 게임처럼 장르의 보편적 문법에 의존하지 않고, 오히려 '단점'으로 언급되던 뻔한 반복과 루즈함을 극복한 사례가 앞으로도 많이 등장하길 기대해본다.


SF, 오컬트, 종교 그 모든 설정들을 의도적으로 만든 '낯섦'이라는 하나의 테마 안에서 녹여낸 <엑스 아스트리스>
불친절하지만 재밌는 게임이라는 말은 성립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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