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만 할 줄 알았습니다.
지난 대선에서 양당 후보 모두 게임을 미래 먹거리로 지목하고, 산업을 육성하겠다고 공히 밝혔습니다. 셧다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게임은 건전한 취미와 사교 활동으로 인정받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조선일보는 8월 8일, 몇 건의 흉기난동 사건 이후 "최근 흉기를 이용한 ‘묻지 마 살인’과 살인 협박이 잇따르는 가운데 칼을 이용한 살인 게임과 실제 범죄 간의 연관성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20년 전의 논문을 가져오면서까지 말이죠.
그리고 8월 11일, 검찰은 신림동 흉기난동 사건의 범인을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검찰은 "게임중독 상태에서 (중략) 젊은 남성을 의도적 공격 대상으로 삼아, 마치 컴퓨터게임을 하듯이 공격한 사건"이라고 밝혔습니다.
의정부 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이해국 교수는 조선일보에 "불특정 다수에 대한 범죄는 게임 등 디지털 매체의 영향부터 고립, 우울 등 여러 요인이 중첩돼 폭발하는 것"이라며 "학교에 정신과 전문가를 투입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게임에 대한 레이드가 시작되려는 듯합니다. 손자는 대결에 있어 '상대를 알고 나를 아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자세라고 강조합니다. 우리도 '쿨 타임'(시전 기간)이 돌았습니다. 그간의 지겨웠던 '게임 탓' 역사를 되돌아봅시다.
2001년 3월 5일, 광주광역시에서는 친형이 동생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사건은 사회적인 파장이 대단히 컸는데, 당시 몇몇 매체에서는 용의자의 게임 중독을 원인으로 지목했습니다.
당시 언론은 이 사건의 용의자가 게임 과몰입 때문에 현실과 게임을 구분하지 못했고, 동생을 게임 캐릭터처럼 여겨 범행을 저질렀다고 전했습니다. 언론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롤플레잉게임인 <이스 이터널>, <영웅전설> 등에 심취해 있었고 최근에는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온라인 게임 <조선협객전>을 즐기는 등 하루 3시간 이상 컴퓨터 게임에 몰두"했다고 썼습니다. 게임 명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이지요.
소년법에 따라 사건 재판이 비공개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사건의 재판 과정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 이 보도 이후 '게임 탓'은 온갖 사건사고의 단골 원인으로 등장했지만, 과학적으로 둘 사이의 연결관계는 대단히 희미합니다. 언급된 JRPG의 엔딩을 봤던 청소년들은 지금 대체로 평범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2022년 5월, <알쓸범잡2>에 이 사건이 소개됐습니다. 방송에는 당시 사건에 대해 조사하고 연구 표창원 소장이 출연합니다. 표 소장은 "당시에 언론에서 답을 찾으려고 게임에 몰입했다"라며 "게임에서 하는 것을 현실에서 하려고 했다고 섣불리 진단했는데, 사실 학술적 의학적 근거는 없다. 어느 한 가지에서 답을 찾으려는 것이 섣부르고 위험하다"라고 경고했습니다.
함께 방송에 출연한 권일용 프로파일러는 "부모가 경제생활을 하다 보니 아이를 돌볼 시간이 없었다. 그것이 방임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라고 이들 가정이 처한 상황에 주목했습니다.
2003년 7월 21일, KBS 토크쇼 <아침마당>에 대한민국 최고의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임요환이 출연합니다.
여름방학 기획으로 준비된 21일 프로그램에서 MC 이상벽은 임요환에게 "게임을 하다 보면 현실 속에서도 누군가 나를 해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느껴지지 않는가?"라고 물었고, 임 씨는 이에 대해 "그런 불안감은 같은 게이머에게나 느끼는 거죠"라고 답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리니지>를 하기 위해서 부모님 통장에서 500만 원을 몰래 빼서서 현금 거래를 했던 한 가정의 아들 사례가 소개됐는데요. MC는 이 사례를 들어 임요환에게 게임중독의 해결 방안을 묻기도 합니다.
이상벽: 전문가 입장에서 (게임중독의) 해결을 좀 이야기해보려고 하거든요. 어떻게 하면 좋을 거 같아요? 당국에서는 어떻게 하면 좋겠고, 업체 측에는 무슨 요구를, 또 학부모들은 어떤 역할을?
임요환: 일단 학부모님들이 자녀들이 게임중독에 이를 때까지 모르시면 안 될 것 같고요. 자녀와 함께 게임 이용이라고 나와 있는데, 그게 제일 나은 거 같아요. 요즘 자녀와 부모님 사이에 대화가 거의 없잖아요. 대화도 많이 하고, 세대 차이도 줄일 수 있고, 공감대가 있어야지 마음이 통할 거 같아요.
이후 임요환 선수의 팬카페는 물론 게임 커뮤니티에서 이 방송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아침마당> 게시판에서는 "사이버 시위"까지 펼쳐졌고, <아침마당> 제작진은 "임요환 씨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프로게이머로서 현재 게임중독에 빠져 일상생활에 지장을 초래하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조언을 하기 위해 출연했으며, 그 취지에 따라 방송이 되었다"라고 해명했습니다.
훗날 <리니지> 500만 원 몰래 인출 사연도 13세 학생이 장난으로 쓴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2020년 5월, KBS에서 e스포츠의 역사에 대해 조명한 다큐멘터리 <더 게이머>에 출연한 임요환은 "예상 질문은 전혀 안 해주시고 아예 다른 부분에 대해서 질문했던 걸로 기억한다"며 "그 당시에 많이 난처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더불어 "지금은 우리나라의 대표 문화가 됐지만, 저 당시에는 저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게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저 당시'로 돌아가려 하고 있습니다.
정말 유명한 사건이죠. 2011년 2월 13일, MBC 뉴스데스크에서는 온라인게임의 폭력성이 현실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내용을 다룬 ‘잔인한 게임 난폭해진 아이들.‥실제 폭력 부른다’ 라는 제목의 뉴스를 방영했습니다. 이때 MBC는 게이머들의 폭력성을 카메라에 담아낸다는 명목 하에 무리수를 던지는 바람에 네티즌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죠.
이 소식을 보도한 기자는 온라인게임이 사람을 어떻게 폭력적으로 바뀌는지 실험하겠다며 PC방 곳곳에 관찰 카메라를 설치한 다음, PC방 전원을 차단해서 흥분한 게이머들을 카메라에 담으며 "순간적인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폭력 게임의 주인공처럼 난폭하게 변해버렸다"라고 보도했습니다. 급기야 같은 보도에서는 초등학교 5학년들에게 성인 등급의 <GTA: 산 안드레아스>를 플레이 시키기도 했습니다.
이 뉴스가 보도된 다음, 방송사 시청자 게시판, 트위터, 각종 게임 커뮤니티 등에서 MBC를 비판하는 게시물이 쇄도했습니다. 특히 PC전원을 갑자기 차단하는 실험은 만화, 유머, 심지어 같은 방송사의 <무한도전>에서도 패러디되며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MBC의 해당 보도 이후에도 방송사의 '게임 탓' 보도는 계속됐습니다. "게임 때문에 혈압이 올라가고 살이 찐다"거나 러시아 월드컵 결승전에 등장한 <포트나이트> 세리머니로 "전 세계에 드리운 게임 중독의 그늘"을 지적하는 방식으로 말이죠. 심지어 세리머니 하나로 게임중독까지 몰고 간 KBS 보도는 외신 보도를 선택적으로 편집했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7월,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MBC의 정전 실험 보도에 대해서 "비객관적이고 작위적 실험 결과"라며 경고 조치했습니다. 먼 훗날(2020년), PC방 게임 폭력성 실험 사건의 주인공인 유충환 기자는 자신의 브런치에 PC방 전원 차단 사건에 대해서 "아주 오만한 생각이었다. 기자 특유의 자만에서 나온 오판이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2013년 4월 30일, 새누리당 신의진 의원은 '중독 예방·관리 및 치료를 위한 법률안'을 발의합니다. 이 법안은 이후 '게임 중독법' 또는 '4대 중독법'으로 불리게 되죠. 19대 국회의 뜨거운 감자였습니다. 4대 중독의 대상은 마약, 술, 도박, 그리고 게임이었습니다.
2012년, 정신과 의사 출신 신의진 의원이 새누리당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합니다. 그 시기 일부 정신의학계는 '중독포럼'을 발했는데요. 이 포럼은 한국을 중독 국가로 규정하고 도박, 알콜, 마약과 더불어 인터넷(게임)을 4대 중독이라고 하며 경제적 손실이 막대하다는 아젠다를 내세웠습니다. 이어 2013년 4월 신의진 의원이 '4대 중독법'을 발의했고, 황우여 당시 원내대표는 게임을 4대악으로 규정했습니다.
중독포럼 핵심 멤버들이 있는 '한국중독정신의학회'는 4대 중독법안을 숙원사업이라고 칭하며 학회 회원들에게 메일을 보냈죠. 4대 중독 입법의 핵심은 국무총리실 산하 국가중독관리위원회 설치였습니다. 예방, 치료 연구인력 양성을 하면 정신의학계에 이익이 되고 지지부진했던 지방의 중독 관련 센터사업에도 힘이 붙게 됐겠죠.
19대 국회에서 이 법을 밀어붙였던 신의진 전 의원은 윤석열 캠프 아동청소년특별위원장으로, 게임업계 매출 1%를 중독 금지를 위해 징수하자는 법을 발의했던 손인춘 전 의원은 윤석열 캠프의 여성특보로 정계에 돌아왔습니다. 특히 신 전 의원은 지난 4월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장으로 중앙당에 복귀했습니다.
참고로 2023년 현재 한국중독정신의학회의 15대 이사장이 바로 이해국 교수입니다.
2019년 5월 25일, 세계보건기구(WHO)는 게임 이용 장애'(Gaming Disorder)를 공식 질병으로 분류한 제11차 국제질병표준분류기준(ICD-11)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ICD-11는 2022년부터 효력을 발생하고 있습니다.
ICD-11에서 게임 이용 장애는 '6C51'이라는 코드를 부여받았으며, '중독적 행위로 인한 장애' 항목에 '도박 중독'(Gambling Disorder)과 나란히 이름을 올렸습니다. 질병코드가 분류되면 각국의 보건당국은 해당 질병의 예방과 치료를 위해 예산을 배정하는 등 보건의료 차원의 실질적 조치를 행할 수 있죠.
게이머들은 당연 분노했습니다. 시민사회에서는 이 질병코드의 국내 반영을 반대하려는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죠. 2013년 4대 중독법 때 등장했던 '게임은 문화다' 캠페인이 다시 부활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2020년, 코로나19의 발발로 모두의 삶이 완전히 뒤바뀌는 경험을 하면서 이 이슈에 대한 관심은 다소 잠잠해졌습니다.
ICD는 권고 사항으로 각 국가의 사정에 따라서 해당 국가의 질병코드를 적용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한국의 질병코드(KCD)는 2025년 개정되는데, 정신의학계에서는 KCD에 게임 이용 장애를 등재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통계청은 질병코드 하나에 이렇게 찬반이 갈리는 경우는 드물다며, 난색을 표한 적 있습니다.
코로나19가 끝났고, 한국은 새로운 KCD를 제정해야 합니다. 디스이즈게임은 게임규제 논란 관련 기사를 모으고 있습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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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루지 못한 사례가 너무 많습니다. 김군의 ISIS 가입에도, 강서구 PC방 살인 사건에도 게임이 원인으로 지목됐습니다. 게임 탓은 20년 넘는 세월을 이어졌기 때문에, 기성 매체가 이래도 게임 탓, 저래도 게임 중독을 지적한 사례는 대단히 많습니다.
처음 '게임 탓'을 당했던 사람들이 이제 어느덧 성인이 되었고, 부모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도심에서 일어나는 흉기난동 사건의 배후에 게임이 지목되고 있습니다. WHO마저 집에서 게임을 하라던 코로나19가 끝나고, '중독세력'들은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구체적으로 어떤 논리를 가지고 있는 걸까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