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에는 5만 개에 육박하는 게임이 입점해 있습니다. 이 수많은 게임을 ‘사용자 평가’ 기준으로 내림차순 정렬해보면 1위에 당당히 오르는 게임이 있습니다. 그 제목도 낯선 <울트라킬>입니다.
FPS <울트라킬>은 최근 1~2년간 거의 항상 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긍정평가 비율은 99%에 달합니다. 평가자 수도 2만 명이 넘습니다. 같은 ‘99% 클럽’ 중 2위인 <어 숏 하이크>와 비교해도 두 배 넘는 수치입니다.
그런데 국내 게이머 대부분에 이 게임은 별로 익숙하지 않습니다. 한때 ‘그것보다 좋다’(better than s*x)는 코믹한 감상평이 화제를 모으면서 본지에서도 리뷰가 나간 적 있긴 하지만, 이 게임 자체를 본격 논의하는 기류는 주변에서 잘 포착되지 않습니다. 거의 ‘초면’처럼 느껴지는 게임이 많은 사랑을 받으며 ‘평가 1위’를 수성하고 있는 셈입니다.
여기까지의 설명을 듣고 <울트라킬>이 대체 어떤 게임인지 직접 살펴보면, 조금 당황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울트라킬>의 그래픽은 PS1 시절, 혹은 그 이전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까요.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진짜 고전게임으로 오해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사실 <울트라킬>은 2020년 출시한 복고풍(레트로) 게임입니다. 더 자세히는 지난 몇 년 동안 미국 등지에서 유행을 타고 있는 FPS의 하위 갈래 ‘부머 슈터’(Boomer Shooter)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부머’는 한국말의 ‘꼰대’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는 그 단어가 맞습니다. 현재 장년이 된 ‘베이비 붐’ 세대를 일컫는 말이었다가, 2019년 경부터는 인터넷 밈으로 소비되며 장년, 노년층을 부르는 경멸하는 명칭이자 세대 간 반목을 상징하는 단어가 됐습니다. 이후 적대적 뉘앙스가 희석되면서 점차 나이 든 사람을 놀리듯 지칭하는 의미로도 쓰이게 됐습니다.
‘부머 슈터’란 ‘부머’들 취향에 맞을 만한 복고풍 FPS라는 의미가 됩니다. 흔히 1990~2000년대 FPS의 영향을 받은 레트로 장르를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둠>, <퀘이크>, <듀크 뉴켐>, <하프라이프> 등 ‘고전 FPS’ 게임들을 직·간접적으로 참고한 경우가 많습니다.
<울트라킬>
부머 슈터가 유행한 계기는 뭘까요? 2016년 <둠> 리부트의 성공이 큰 역할을 했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최초 기획에 따르면, 이 게임은 원래 두 세력 간의 장대한 전투를 다룬 <기어즈 오브 워> 혹은 <콜 오브 듀티> 스타일 슈터가 될 뻔했습니다.
그러나 개발사 이드소프트가 ‘<둠> 같지 않다’고 판단해 게임성을 갈아엎었고, 그렇게 다시 만들어진 것이 2016년 <둠>입니다. <둠>은 한동안 트리플A 슈터의 전형처럼 자리 잡고 있던 화려하고 정제된 스타일의 FPS를 본격적으로 탈피했습니다. 대신 고전 <둠>을 비롯한 클래식 슈터의 지극히 공격적이고 스피디한 게임플레이에 방점을 찍었습니다.
스타일리시한 무기를 품에 잔뜩 지닌 채, 바쁘게 움직이면서 쉼 없이 적을 없애는 <둠>의 게임플레이는 올드 팬덤의 잊고 있던 감수성을 되살렸고, 덕분에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성공적으로 바통을 이어받은 작품 중 하나는 <더스크>입니다. 사이비 종교집단과 그들이 소환한 악에 맞서 싸운다는 간단명료한 스토리라인을 지닌 <더스크>는 <둠>과 비슷한 이유로 열렬한 호응을 얻었습니다. <울트라킬>과 유사하게 스팀 기준 1만 3,000여 리뷰어 중 97%로부터 긍정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둠>과 <더스크> 사이에는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둠>은 베데스다 산하 이드소프트의 트리플A 게임이었지만, <더스크>는 인디 개발사의 저예산 작품이라는 점입니다.
개발사 뉴 블러드 인터랙티브는 게임성뿐만 아니라 그래픽 스타일에서도 ‘레트로’를 표방하는 선택을 했고, 이는 유효했습니다. 유저들은 <더스크>의 올드한 그래픽을 고유한 스타일로써 인정해 호응했고, 이것이 더 많은 저예산 레트로 슈터들이 만들어질 수 있는 좋은 발판이 되어주었습니다.
2010년대 복고의 일환으로 재도입됐던 픽셀 아트가 점차 인디 게임계의 보편적인 창작 방식으로 자리 잡았던 것과 유사한 맥락으로 보입니다. 비용·인력이 적게 드는 특성이 인디 개발사의 생리에 잘 맞아떨어졌고, 팬들 또한 긍정 반응을 보였기 때문에 ‘복고 그래픽’은 하나의 분명한 지류를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한때의 유행’이 아니란 것을 증명하듯 부머 슈터 장르에서는 꾸준히 평단과 유저를 모두 만족시키는 수작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최근 험블번들이 이런 게임들을 묶어 ‘부머 슈터 번들’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그간 주목받은 게임들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더스크> (Dusk) 속도감 있는 게임플레이, 다양한 총기, ‘오컬트’ 테마에 맞는 음산한 비주얼과 음악으로 사랑받습니다. 고도의 실력을 필요로 하는 어려운 난도 역시 주요한 특징입니다.
<어미드 이블> (Amid Evil) 로우 폴리곤 기반이지만 총기 이펙트 등에서는 부분적으로 최신 그래픽을 사용해 독특한 비주얼을 연출합니다. 다양한 무기와 적, 각각의 확연한 테마를 갖춘 7개의 레벨 디자인, 흥미로운 보스전 등이 장점으로 꼽힙니다.
<프로데우스> (Prodeus) 바삐 움직여야 하는 박진감 넘치는 플레이, 저마다의 작동방식을 갖춘 무기 등이 호평받습니다. 잔혹하지만 호쾌한 연출 덕에 ‘<둠>보다 더 <둠> 같다’는 평가도 종종 나옵니다.
<울트라킬> (Ultrakill) 서양권 고전 슈터뿐만 아니라 <데빌 메이 크라이>의 콤보 시스템, 현대 FPS의 ‘무브먼트’ 시스템 등을 참고해 더 화려한 게임플레이를 추구합니다. 적의 ‘피’를 회복 수단으로 설정함으로써 한층 공격적인 플레이를 유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