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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G 20] 업계 떠난 개발자의 한마디… "왜 재미있는 게임을 만들지 않는 거죠?"

막고야, 엔씨소프트, 그리고 엑스엘게임즈의 채윤호 ⑤

김재석(우티) 2025-04-22 19:03:17

디스이즈게임은 창간 20주년을 맞아 <세균전>, <리니지>, <XL1>, <아키에이지> 등의 개발에 참여한 채윤호 나이트앤비숍 대표를 인터뷰했습니다.


1990년대부터 게임 산업의 한 페이지에 있었던 그는 돌연 굴지의 대기업 엔씨소프트를 떠나 엑스엘게임즈의 창립에 기여했습니다. 그랬던 그는 비운의 레이싱게임 <XL1>, 그리고 단 한 번도 공개되지 않은 미공개 타이틀 등을 개발하다가 엑스엘게임즈 또한 홀연히 떠났습니다. 이후 그는 관리자의 역할로 몇 가지 게임의 개발총괄 등을 맡았지만 세상은 그들 게임에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게임 업계에서 물러나 교육과 멘토링 사업에 주력하고 있는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게임 산업이 다시 재밌어지면 좋겠다'입니다.


[이전 기사]


애니메이션 오타쿠, 한국 게임 개발의 첫 페이지에 뛰어들다 (바로가기)

디지털 국어사전 만들던 엔지니어, 리니지 개발자가 되다 (바로가기)

리니지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上): 낭만과 야만 사이 (바로가기)

리니지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下): '우주먹튀'의 뒷면 (바로가기)


채윤호 나이트앤비숍 대표




Q. 디스이즈게임: 2002년은 어떤 해로 기억되는지요?


A. 채윤호 대표: 엔씨는 국내에서 성장세가 계속되면서 인원도 많이 늘어났고요. (리니지에서) 하고 싶었는데 없어서 못 하던 것들도 하나씩 해나갔습니다. SI 팀이 주축이었던 회사에서 게임 중심으로 피봇이 일어났죠. SI팀이 NC ST로 분사하게 됐고요, 그 안에서 게임을 하려고 넘어온 팀원들이 생겨났습니다. 한 구석에서 3명이 만들던 <리니지>가 회사를 대표하게 된 것입니다. (데스티네이션 게임즈 인수로) 미국 시장에 대한 정보가 생겼고요. 개리엇의 팀을 통해서 네트워킹이 확장됐습니다.



Q. 항간에서는 데스티네이션 게임즈가 아레나넷을 소개했다, <리니지 2> 개발에 조언을 해주었다 이런 소문이 돌기도 했는데요.


A. 앞에 것은 사실에 가깝고, 뒤에 것은 틀렸습니다. (아레나넷 인수는) 리차드의 형 로버트 개리엇이 NC 미국 지사장을 맡으면서 인맥이 닿게 된 건입니다. <리니지 2>는 한국에서 배재현, 김형진(두 개발자에 대해서는 전회 참조), 박용현(현 넥슨게임즈 대표) 세 명의 개발자가 만들던 프로젝트입니다. 리차드 개리엇 팀이랑 교분이 있었던 것은 미국에 있던 제이크(송재경) 쪽이었습니다.


2011년 디스이즈게임을 만난 아레나넷의 개발진. 가장 왼쪽이 마크 오브라이언.


Q. 엔비디아와 언리얼엔진의 성장에 엔씨소프트의 역할이 컸다고요.


A. 이건 제가 '그렇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 무렵(2003) 엔비디아는 언더독이었어요. ATI가 메이저였죠. 엔씨가 당시 PC방을 대상으로 엔비디아 카드와 콜라보 마케팅을 대대적으로 진행했습니다. PC방 업주에는 나쁠 게 없는 거죠. <리니지 2>가 잘 돌아가는 PC가 많아지는 거니까. PC방에게 엔비디아 그래픽카드를 대량으로 구매해서 저가에 교체해 주는 프로모션이랑, 버스 래핑 광고를 진행했어요.


<리니지 2>가 오픈월드로 개발됐는데 그때만 해도 언리얼엔진이 오픈월드 게임 개발에 적합한 엔진이 아니었어요. 다 엔씨 <리니지 2> 개발자들이 뜯어고치고 갈아엎으면서 만든 겁니다. 크라이엔진도 엔씨가 <아이온>을 만들면서 엄청나게 뜯어고쳤죠. 엔진 개발사들이 엔씨 덕을 본 측면이 분명 있는 겁니다. 앞장서서 그런 엔진의 활용성을 끌어올린 것이니까요. 



Q. 그렇게 결국 최초의 3인방(송재경, 김민수, 채윤호) 중에 마지막으로 <리니지>에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A. 제이크는 미국에 있고, 김민수(전회 참조)가 먼저 퇴사하면서 허리가 뚝 잘린 느낌이었죠. <리니지 2> 개발팀까지 세팅되면서 <리니지> 라이브에는 제가 가장 오래 남아있는 상황이 됐어요. 제이크가 한국에 돌아왔지만, 얼마 안 있다가 퇴사를 했습니다. 저도 <리니지> 팀이 아닌 다른 팀을 꾸리게 됩니다. 


그렇게 나온 게임이 <리니지 토너먼트>인데 기본적으로 모여있던 개발자들 아이디어는 <리니지> 캐릭터를 이용해서 대전하는 게임을 따로 만들고 싶었던 거예요.  승광빌딩 꼭대기에서 <리니지 토너먼트>를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개발팀 중심의 회사였다 보니까 개발팀의 파워가 강력했습니다. 순서상으로 사업 조직이나 GM 조직은 나중에 생겨났죠. 개발이 우선순위가 강한 느낌으로 프로젝트가 진행됐는데 <리니지 토너먼트>는 좀 달랐어요. 제일 플레이어들을 많이 상대하는 GM이나 PC방을 돌아다니는 사업 이야기를 들어보면서 '무엇이 필요한가'를 물어봤어요. 이 시기 <리니지>는 이제 도식화된 체계가 있고, 세계관이 있고, 유저들이 많아졌기 때문에 하고 싶어도 하고 싶은 걸 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어요.


영토가 늘어나고, 새로운 몬스터와 지역들이 생겨나고, 공성전까지 <리니지>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았지만, PK에 대한 이슈가 남아있었어요. 카오(Chaotic,카오틱 성향의 유저) 유저를 불량 유저로 취급하는 문화가 생겨났는데 이거 저희 기획 의도가 아니었어요. 뉴트럴(Neutral)이든 로우풀(Lawful)이든 그냥 그 세상 안에서의 역할인 거잖아요. 카오는 빌런 역할을 맡은 것뿐이죠.


근데 카오를 배척하는 형태의 게임플레이가 고착화되고, 게임의 PK가 현실에까지 번지면서 이래저래 이상하게 된 거예요. 그러면 자신의 강함을 과시하고 싶은 유저는 어디에 가느냐는 거예요. 그런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게 <리니지 토너먼트>입니다. <리니지> 본 서버에 있는 데이터와 캐릭터를 몽땅 데리고 오고, 배경만 새로 만들어서 싸운다. 고렙 유저들은 자기들끼리 싸우고, 저렙 유저들은 저렙 유저들끼리 모아주는 매칭 개념을 도입했고요. 그때 저와 이런 고민을 나눈 사업팀장이 엄우승(편집자 주: <리니지>, <아이온>, <테라>의 사업 담당을 역임)입니다.


그렇게 깃발 뺏기 형태의 룰도 만들고, 팀전 룰도 만들고, 서로 어떤 방에서 마주쳐서 싸운다는 룰도 만들면서 레벨 디자인을 새로 만들었습니다. 2002년 대한민국게임대전(KAMEX)에서 시연이 이루어졌습니다.


<리니지 토너먼트>


Q. 그때 메인은 <리니지 2>였을 텐데요.


A. 맞습니다. 무대 중앙을 기준으로 왼편을 <리니지 2>가 쓰고 오른쪽 공간을 리니지 토너먼트가 썼어요.​ 중간 쪽에는 가져온 게임들(<샤이닝로어>와 <시티 오브 히어로즈>)이 있었고요. 한쪽에 제이크가 개발하던 프로젝트가 시연되고 있었고, 저는 사업팀과 <리니지 토너먼트>로 '리니지 월드 챔피언십'이라는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원래 국내 서버, 일본 서버, 대만 서버 전부 버전이 다르기 때문에 같이 플레이할 수 없었지만, 각 지역의 최고 플레이어들이 모여서 <토너먼트>에서 자웅을 겨루는 그런 기획이었습니다.


<리니지 토너먼트>가 국제 대회를 위한 플랫폼이 된 거죠. 대전 게임을 하는 모습을 보는 것처럼 스크린으로 중계 화면을 띄웠어요. 그리고 전용준 캐스터를 섭외해서 오프라인 행사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Q. 분위기 좋았나요?) 좋았습니다. KAMEX 끝나고 칭찬도 받았으니까요. 저 개인적으로도 기사회생한 느낌이 들었죠. 그렇게 나온 게임(리니지 토너먼트)도 반응이 제법 괜찮았거든요.



Q. 2004년 돌연 엔씨소프트를 떠나서 엑스엘게임즈 설립에 참여합니다.


A. 엔씨에서는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어요. <리니지 토너먼트>도 결국 <리니지>의 부록이고, <리니지 2>로 (회사 방향성이) 세팅이 되었으니 제이크와 김민수와 엑스엘게임즈를 창업한 거죠. (Q. 바로 레이싱게임 <XL1>을 만들었나요?) 아니오. 좀 놀았어요. (웃음) 그 무렵 엑스엘게임즈의 창업이 게임 업계에서 큰 뉴스였죠. <리니지> 3인방이 스타트업을 차렸다니까. 기자분들이 오셔서 '너희 요즘 뭐 만들어?' 하면 '아무것도 안 만드는데요?' 할 때가 있었어요. 진짜 아무것도 안 만드는 때가 있었어요.


물론 차기작 고민을 하긴 했죠. 하나는 RPG였고, 다른 하나는 레이싱게임이었어요. RPG는 해봤잖아요. 오래 걸리는 것을 알고 있었죠. 3년 이상 걸리는 프로젝트라는 걸 알고 있었고, 돈도 많이 들고, 부담스러웠습니다. 가난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큰 프로젝트를 할 만큼 여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죠. 적극적으로 외부 투자를 받을 생각도 없었죠.


제이크는​ 개발자가 RPG의 방대한 세계관과 설정 작업을 정교하게 하는 것보다는 원작이 있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었어요. <바람의나라>가 그랬고 <리니지>가 그랬잖아요. 새 회사를 차리고 나서도 IP를 막 탐독했습니다. 그때 눈여겨본 것 중 하나가 <불의 검>이었습니다. 결국에는 전민희 작가와 함께 <아키에이지>의 세계관을 함께 만들어서 게임이 되죠.


창업 초기 엑스엘게임즈의 사무실 모습


Q. 그보다 앞서는 엑스엘게임즈의 첫 게임은 레이싱게임 <XL1>이었습니다.


A. 얘(MMORPG)는 오래 걸리잖아요. 여기에 발을 들이기 시작하면 시간이 오래 걸리고, 사람도 지치니까 <XL1>을 1년 안에 끝내는 캐주얼 레이싱 게임으로 생각했어요. <카트라이더>처럼 말이죠. 엔씨도 그렇고 넥슨도 그렇고 우리가 뭘 만드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가장 열심히 노크한 게 네오위즈였습니다. 


편집자 주: <XL1>은 네오위즈의 피망에서 2006년 4월 오픈베타 서비스를 시작했다. 이보다 2년 앞서는 2004년 11월, <카트라이더>의 성공 뒤 넥슨을 떠난 일군의 개발자들은 J2M소프트를 설립하고 <레이시티>라는 레이싱게임 개발에 착수했다. 다시 2006년 4월, <레이시티>의 피망 입점이 발표됐다. 피망에는 두 가지 레이싱게임이 공존하게 됐고, 승리는 <레이시티>에게 돌아갔다. 당시 엑스엘게임즈 3인방은 피망에 <레이시티>가 서비스될 것이라 예측하지 못했다.


레이싱게임을 만들기로 하면서 제이크의 미국 인맥이 붙으면서 엑스엘 오스틴이 세워졌습니다. 엑스엘 이후에 다들 구글이나 애플에 바로 이적할 수 있는 수준의 좋은 엔지니어들이었습니다. 엑스엘 오스틴에 10명이 생겨났고, 엔씨에서 나와서 우리한테 오는 친구들이 생겨나서 한국에도 10명 정도 생겨났습니다. 저랑 민수는 레이싱게임을 기획하고, 가장 어려운 물리엔진은 미국에서 도맡았습니다.


저는 출시가 임박할 즈음부터는 개발 업무 이외에 실제 자동차 메이커들의 라이센스를 받아오는 업무도 하게 되었습니다. 자동차 로고가 들어간 경우에는 절대로 그 자동차가 파괴되면 안 되더라고요. 담당자마다 '우리 게임은 파괴 메커니즘이 없다'고 설득했습니다. 벤츠, BMW, 폭스바겐, 렉서스 순으로 라이선스를 받았습니다. GS칼텍스 KIXX 레이싱 팀이 쓰던 자동차도 네오위즈 쪽에서 연결해 줘서, IS250 레이싱카도 래핑 그대로 게임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XL1>은 저희가 바라던 성공을 하지 못했습니다. 엑스엘 입장에서는 흥행 실패의 원인에 관해 퍼블리싱 과정에서 생긴 논란(편집자 주 참조)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민수는 <XL1>의 싱글 버전이라도 되살려놓는 수준에서 만족해야 했어요. 그리고 저는 외부에 단 한 번도 이야기한 적 없는 프로젝트를 맡게 됩니다.


그래픽 측면에서는 호평을 받았지만, 결국 유저들의 선택을 받지는 못한 <XL1>


Q. 그게 무엇인가요?


A. 소니는 PS3에 네트워크 카드를 내장하기로 합니다. PS2까지만 해도 네트워크 카드는 따로 판매되는 물건이었죠. 그런데 PS3에서 네트워크 카드를 내장한다니 일대 뉴스였죠. 당시 소니에 퍼스트파티 게임이 딱 2개 있는데 하나는 <그란투리스모>고 다른 하나는 <모두의 골프>였습니다. PS3이 승기를 잡기 위해서 당시로는 시도한 적 없던 세컨드 파티 정책을 펼쳤고, 그 리스트에 엑스엘게임즈가 들어갔습니다.


온라인게임에 풍부한 경험이 있으니 네트워크 카드의 기능을 쓸 만한 게임을 만들어달라는 거였죠.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게 대외비로 진행되던 프로젝트입니다. 새 게임의 PD가 되어 소니와 함께 게임을 만들었지만 결국 엎어졌습니다. <리그 오브 레전드>가 나오기 전이었고 <카오스>나 <도타>가 막 인기를 끌던 시점입니다. 크라이나 언리얼 엔진을 쓰지 않고 자체 엔진을 만들어서 반영했습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본계약 진행 전에 엎어졌습니다. 이보다 자세한 이야기는 기사에 쓰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Q. 이후 전민희 작가와 <아키에이지> 초기 설정을 만들다가 또 돌연 엑스엘게임즈를 떠났습니다.


A. 맞습니다. 전민희 작가와 매주 '이 지역은 어떤 지역이야', '이곳의 기후와 식생은 이런 느낌이야' 같은 설정을 구체화했습니다. 초기 세계관 설정이 70~80% 정도 마무리됐을 때 엑스엘을 떠났습니다. 쭉 커리어를 이어오면서 '현타'가 왔어요. 사람한테 지쳤고 한동안 쉬었습니다. 이후 GF게임으로 돌아와서 <마경기담>을 만드는 스튜디오를 관리하게 되었는데, 임금체불이 있었어요. 그러면 남아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나오게 됐죠.


2010년에 한게임의 투자를 받아서 링크스스튜디오라는 곳의 대표를 맡았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사장을 맡게 된 곳입니다. 유럽을 공략하기 위한 MORPG를 만들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이온소프트에 있던 <플리프>(flyff) 개발팀을 인수해서 완전히 다른 장르의 게임을 개발하다가 접혔습니다. 때가 안 좋았어요. 판이 PC에서 모바일로 넘어가고 있을 때였어요. 더는 시장에서 PC게임을 원하지 않더군요.


이후에는 엔씨 출신 김승권 대표가 설립한 트라이팟 스튜디오에서 <매드8> 개발을 돕다가, 코로나가 터졌습니다. 모바일게임 세상이 됐고, 이 세상에서는 기획자가 게임을 기획하는 시장이 아니게 된 것만 같았습니다. 가챠가 중요한 비즈니스 모델(BM)이 됐고, 론칭을 하려면 대형 퍼블리셔를 꼭 껴야만 하고, 게임을 어떻게 잘 만드는지보다는 BM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업계가 되었다고 느꼈어요.


<아키에이지> 또한 12년 만에 서비스를 종료했다. 엑스엘게임즈는 언리얼 엔진 5를 사용한 후속작 <아키에이지 크로니클>을 개발 중이다. 후속작 프로젝트를 이끌던 송재경 前 COO는 돌연 엑스엘게임즈를 떠나 장현국 넥써쓰 대표가 이끄는 '오픈게임재단'에 합류했다.


Q. 오랜 인터뷰를 나누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올드비로서 지금의 업계에 전할 말이 있다면요.


A. 콘텐츠나 서비스의 기획적인 안목과 기술이 늘어가면서 정리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생각, 궁리, 고민, 설계, 기획, 디자인 등, 이 모든 것이 'Design'의 다른 말인데요. 그 끝에는 '설득'이 있습니다. 설득이 없는 기획은 '강요'이며, '강요'를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나이 들어서 생각의 영역이 넓어지는 경험을 하게 됐습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환경을 만나야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김규호 교수님(전회 참조)이 그런 계기와 새로운 저의 소질을 발견하게 해주셨죠. 어려운 것을 설명하는 것,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 판교에 처박혀 있었으면 만나지 못했을 여러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시야가 넓어졌습니다. 다른 업종과 협업하면서 소프트웨어 기술과 산업을 바라보는 눈도 달라졌습니다.


게임 산업은 어떤 산업보다도 새로운 기술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받아들이며, 주도하기도 하는 그런 산업입니다. 그럼에도 다른 산업과 교류는 별로 없는 편입니다. IT 업계가 자동차 업계라면 게임은 F-1 같은 것입니다. 다양한 신기술과 UI/UX가 실험되고 양산됩니다. 이보다 좋은 레퍼런스도 드물어요. 게임 산업이 다시 재미있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에 <세이브 더 게임> 상영회에서 장인경 대표(편집자 주: 미리텔레콤 사장, 그녀의 회사에서는 <단군의 땅>, <쥬라기 원시전>, <아크메이지> 등이 개발됐다)가 "한국 게임 산업은 다른 산업들과 다르게 (국가 지원 없이) 자력으로 성장했다"고 하시더군요. 그런 게임 산업이 여러 가지 이유로 특유의 재미를 잃어가고 있는 느낌입니다. '재미'는 게임 산업의 본질입니다. 본질을 잃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게임엔진이 점점 강력한 프레임워크가 되면서 게임 엔진을 중심으로 다양한 오픈 이노베이션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아주 재미있는 시기에 AI가 급성장하고 있어서 더욱 재미있는 프로젝트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과 생각의 변화가 교육과 멘토링 쪽으로 저를 움직이게 했습니다.


게임은 교육과 대척점에 있지 않습니다. 뭔가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혀서 숙련되면 다음 단계로 성장하는 구조가 동일합니다. 그런데 왜 교육은 재미가 없을까요? 재미있는 것은 교육이 아니고, 무겁고 진지해야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책임입니다. 뭔가를 배우는 것은 원래 '재미'있는 것입니다.


과거는 과장이나 미화가 되기 마련인데요. 누군가에게 설교하거나, 누군가를 불편하게 할 생각은 없기에, 디스이즈게임이 이 사업을 하는 취지를 알고 있기에, 그저 담백하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장황한 이야기 들어주시고 정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옛날이야기는 옛날이야기일 뿐, 그냥 가볍게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리고, 디스이즈게임의 20주년을 축하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재미'있는 회사로 남아주시길 희망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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