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연구자가 생존을 위해 다른 분야로 도망가야 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학술대회의 라운드테이블에서 어떤 교수가 던진 고백이다. 이 씁쓸한 고백은 한국 게임 산업의 이면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20조 원 규모로 성장한 게임 산업의 화려한 성과 뒤에는, 게임을 연구하는 일의 현실적 어려움이 깊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21일 연세대 성암관에서 열린 제1회 디그라 학술 대회 라운드테이블은 이러한 고민을 나누는 자리였다. 2025년 공개 예정인 넥슨 게임 다큐멘터리 3부작을 중심으로, 업계와 학계를 대표하는 전문가들이 한국 게임 산업과 연구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논했다.
박윤진 감독, 디스이즈게임 임상훈 대표, 경희대 유창석 교수, 가천대 오영욱 박사가 패널로, 청강대 이득우 교수가 모더레이터로 참여한 이 자리에서는 한국 게임 연구의 새로운 전환점을 모색하는 깊이 있는 대화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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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슨의 새로운 다큐멘터리는 한국 게임의 역사를 세 개의 관점으로 나누어 조명한다. 1부는 1980년대 국산 게임 개발자들의 이야기를, 2부는 2000년대 온라인 게임 유저들의 경험을, 3부는 한국 게이머들의 정체성을 다룬다. 박윤진 감독은 다큐멘터리의 기획 의도를 소개했다.
"이 다큐멘터리 3부작을 처음 기획할 때 가장 많이 신경 썼던 부분은 단순히 연도로 나누지 말자는 것이었어요. 80년대 게임, 90년대 게임, 2000년대 게임 이렇게 나누기보다는, 1편에서는 개발자들의 그 당시에 어떤 열정이나 청춘, 꿈 같은 가치들이 담기기를 바랐고, 2편 같은 경우는 2000년대 온라인 게임을 즐겼던 유저에 초점을 맞춰보자 했어요. 너무 산업에 대한 얘기만 많았던 것 같아서, 유저의 이야기를 많이 담도록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1, 2부는 각각 80분, 70분으로 이 장편 다큐멘터리고, 3부는 30분 정도로 짧고 호흡도 빠른 다큐멘터리예요."
사실, 한국의 게임 산업은 글로벌 게임 산업과 시작점이 조금 다르다. 초고속 인터넷과 PC방 문화와 함께 온라인 게임을 중심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온라인 게임의 역사를 다룰 때에는 게임을 만드는 개발자의 이야기를 주목해 왔다. 그러나 이번 다큐멘터리의 2부에서는 온라인 게임을 즐기는 플레이어들에게 초점을 맞춘다.
"게임이 연결되고 또 함께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기도 하며, 그 경험을 토대로 현실에서 내가 성장하는 경험을 많이 했다고 생각하거든요.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 그 시대의 유저들이 함께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2편에서는 산업적 성장도 물론 짚어주지만, 시대가 남긴 가치를 좀 담아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과거에 뭔가 행복했던 기억들은 지금 왜 우리를 또 나아가게 하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이 다큐멘터리가 공개가 되면 그 당시 온라인 게임을 즐겼던 많은 유저들의 기억을 소환하고 함께 이야기해보고자 이 2편을 유저 중심의 다큐멘터리로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게임 다큐멘터리, <세이브 더 게임>과 <온더라인>의 박윤진 감독
그러나 한국 게임의 역사를 기록하고 연구하는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게임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수집하는 과정에서 여러 한계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특히 온라인 게임은 지속적인 업데이트로 인해 과거 버전이 사라져 예전 자료를 구하기 어렵다는 특징이 있었다.
임상훈 대표는 게임 매체 대표로서 한국 온라인 게임의 성장기를 회고했다. 당시의 급격한 변화 속도는 깊이 있는 기록과 연구를 어렵게 만든 주요 원인이었다. 특히 MMORPG라는 장르의 특성상, 게임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장기간 관찰하고 기록하는 것은 매우 도전적인 과제였다고 전했다.
"세상이 새로운 게임들이 너무 빨리 나오고, 해외로도 빠르게 진출하니까 연구자나 기자 같은 사람들은 너무나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면서 그걸 따라가는 데 급급했을 것 같아요. 일단, 그럴 때 만나야 할 사람은 게임 업계 관계자가 가장 1순위였을 거고, 업계 변화를 바라보는 시각이 많았겠죠."
게임 연구의 구조적인 문제도 있었다. 유창석 교수는 게임 연구가 학계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던 현실을 지적했다. 이는 많은 연구자들이 생존을 위해 다른 분야로 전향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사실 제가 지난 2000년대, 2020년 전까지 게임 연구를 하다가 포기한 적이 한 번 있었거든요. 왜 그랬냐면, 논문을 쓰면 맨날 '참 좋은 주제인 것 같지만 우리 저널하고는 잘 안 맞는 것 같아'라는 이메일들을 매달 받아서, 그러면서 사람의 모럴이 떨어지면서 '내가 먹고 살 수 있을까, 학교에서 생존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 때문이었어요. 실제로 이 분야 연구자로 살아남기가 쉽지 않아요. 지원도 많지 않고요."
유창석 교수는 자신의 경험에 말미암아 게임 연구계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지적했다.
한편, 게임 산업 자체의 문제를 지적하는 의견도 이어졌다. 유창석 교수는 확률형 아이템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는 현재의 'BM'을 지적했다. 그는 게임이 서비스로 변화하게 되면서 'BM'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들이 늘어났고, 그것을 너무 의식한 나머지 BM에 대한 연구를 회피하는 경향이 생겼다고 봤다. 반면에 중국은 이 문제에 대해 계속해서 R&D 해왔고 그 결과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고 전했다.
"비즈니스 모델, 즉 가격 자체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왜 어렵냐면, 이것을 잘못 건드리면 갑자기 매출이 변하니까 경영자도 개발자도 건드리기를 싫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구하는 학자나 부서도 굉장히 적습니다. 어렵다고 연구를 안 했던 게 사실은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지금이라도 연구를 하시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고, 최근 한국에서 혁신적인 비즈니스 모델이 몇 가지 등장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등장하면 소비자들의 상한 마음도 조금 누그러지지 않을까 기대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임상훈 대표는 미디어의 관점에서 '게이머 양극화' 현상에 대해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게임 산업과 연구가 직면한 문제들에 대한 다양한 해법을 제시했다. 특히 연구 방향성에 대한 구체적인 제안들이 이어졌다.
유창석 교수는 단순한 순기능과 역기능 구분을 넘어 온라인 게임 세계에서 발생하는 현상과 사회적 연결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전했다. 특히 온라인 게임 공간에서의 상호작용을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규모 온라인 게임 세계에서 어떤 현상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어떤 만남들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연구자분들이 잘 연구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연결들이 일어나는 중에는 좋은 연결도 있을 수 있지만, 나쁜 연결도 있고 특히 초등학생들은 그러한 것들을 구별하는 데 상대적으로 취약한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오영욱 박사는 현대 게임 산업의 복잡한 수익 구조가 특히 어린 이용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가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이는 게임 산업만의 문제가 아닌 디지털 콘텐츠 전반의 과제라고 설명했다.
"다양한 플랫폼이 어린이 게이머를 대상으로 많이 활약하고 있는데, 사실 게임의 비즈니스 모델이 엄청나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복잡하게 계산하여 어느 정도 돈을 쓰는지 잘 인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상황은 게임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는 그 문제가 글로벌하게, 특히 한국보다는 외국에서 많이 제기되고 있고, 이 부분에 대한 규제는 피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가천대 오영욱 박사는 오랫동안 게임을 개발해 온 입장에서 여러 관점들에 대해 설명했다.
"VR이 미래인 것처럼 얘기하던 시기가 한 10여 년 전에 있었잖아요. 정부에서 그쪽에 돈을 다 몰아주기도 했었고, 여기저기 업체들이 VR에 들어갔고, 그런데 이제 VR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그게 잘 될지 안 될지에 대해서 사이즈에 대한 고민 없이 막 들어갔던 것 같고, 이게 잘 안 되니까 그다음에는 이제 P2E라고 부르는 블록체인이 뜨니까 또 코인 게임이라고 하면서 난리가 났었죠. 우리나라 게임 산업이 중국에 밀린다거나 밀리는 현상들이 굉장히 많은 시간을, 많은 업체가 쓸데없는 짓을 하면서 날려버리게 되면서 집중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해서 지금 이렇게 비춰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회자인 이득우 교수는 게임의 재미와 가치가 세대별로 다르게 정의되고 있음을 연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산업적 성공과 상관없이 많은 게임들이 나름의 재미와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새로운 플랫폼을 통해 재발견되는 현상에 주목했다. 또한 숏폼 콘텐츠의 영향으로 게임의 재미에 대한 기준도 변화할 것이라 전망했다.
"저는 우리 아이들과 같이 마인크래프트 모드 게임을 굉장히 많이 했는데, 단순하면서도 재미있는 게임들이 충분히 많았거든요. 그런데 그것들이 산업화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 소외가 되고 있다고 생각해요. 굉장히 유행하는 배드워즈 같은 장르들은 사실 일반인들이 서비스로는 접하지 못하는 게임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이제 로블록스라는 플랫폼화되면서 어떻게 보면 새로운 재미를 찾은 거라고 보고요. 숏폼 콘텐츠가 많이 대체되면, 흥미로운 게임에 대한 기준도 앞으로 많이 달라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들을 잘 관찰하고, 우리 학계가 해야 할 일 아닌가 싶습니다."
청강대 이득우 교수는 UGC에 주목하며 게임의 재미와 가치가 세대별로 다른 양상이 나타나고 있음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