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프라이프 2>와 <젤다의 전설: 야생의 숨결>은 서로 매우 다른 게임이지만, 중요한 공통점도 가지고 있다. 동시기에 나온 경쟁 게임들과 비교해 현실에 존재하는 물리법칙을 좀 더 충실하게 구현했다는 점이다.
이는 ‘창발적 플레이’(emergent gameplay)를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된다. ‘창발적 플레이’란, 플레이어가 정해진 방식이 아닌 자신만의 방법으로 게임을 풀어나갈 수 있는 게임 설계를 말한다. <야생의 숨결>은 ‘창발적 플레이’를 특히 많이 접할 수 있는 게임이다. 예를 들어 주인공 링크는 적이 던지는 돌을 검으로 테니스 하듯 되받아쳐 역으로 대미지를 입힐 수 있다.
이는 돌과 검의 상호작용, 돌과 몬스터의 상호작용이 물리적으로 구현되어 있지 않다면 실현될 수 없는 장면이다. 그렇다면 실제 물리법칙에 기반한 애니메이션을 구현하는 기술이 완성된다면 어떨까? 더 현실적이고, 몰입감 높은 게임이 제작되리라 예상할 수 있다.
넥슨 산하 엠바크 스튜디오는 현재 이러한 기술 연구에 몰두 중이다. 그리고 그 일환으로서 ‘로봇 훈련’에도 매진하고 있다. 톰 솔버그 엠바크 스튜디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의 NDC 2021 강연을 통해 그 이유와 목표, 전망을 알아보았다.
강연자: Tom Solberg
소속: 넥슨 엠바크 스튜디오
상술한 것처럼 물리기반 애니메이션은 보편적 유저들에게 더 풍부한 게임 경험을 선사해준다. 현실의 물리적 상식을 게임 속에서 그대로 응용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게이머들은 ‘게임 속 상식’에 따라 플레이해왔다. 그러나 현실 물리법칙이 게임에 구현된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유저들은 현실세계에서 쓰이던 상식과 통찰력을 바탕으로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불 속성 보스와 싸울 때, 근처에 있는 물을 양동이로 끼얹어서 처치할 수 있다면 어떨까? 이는 게임경험의 풍부함과 몰입감을 비약적으로 강화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
엠바크 스튜디오는 상술한 물리 기반 애니메이션 시스템 개발의 일환으로 가상의 인공지능 로봇들을 만든 뒤 ‘강화학습’(reinforcement learning)을 통해 스스로 움직임을 터득하도록 ‘훈련’시키고 있다. 물리법칙에 부합하는 현실적 객체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나가기 위함이다.
머신러닝의 한 유형인 강화학습은 인공지능이 취하는 여러 행동 중, ‘임무’에 부합하는 행동에만 보상(점수)을 부여하는 학습 방식이다. 과정을 반복하면 인공지능은 점차 ‘임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방식을 스스로 터득하게 된다. 동물들의 훈련 원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간식을 이용해 ‘착한 행동’을 보상하는 견공 훈련의 일반적 과정을 떠올려보면 비교적 이해하기 쉽다.
엠바크 스튜디오는 시스템상에 수천 개의 로봇 사본을 만들어 학습을 진행하고 있다. 장애물 오르기, 높이 뛰기 등 여러 임무를 부여한 뒤, 가장 유효한 움직임 방식을 스스로 익히도록 한다.
로봇이 학습한 ‘움직임’을 평가하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방식이 쓰인다. 하나는 해당 이동방식을 통해 얼마나 더 많은 보상을 얻었는지 측정하는 것이다. 더 많은 보상을 얻은 이동방식일수록 더 효율적인 움직임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최종 목표는 게임 개발인 만큼, 이 움직임이 일반적인 시각에서 봤을 때 어색하지 않도록 조율하는 과정도 중요하다. 그래서 개발진이 직접 로봇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보기에 이상하지 않은지’ 점검하는 과정도 거친다.
솔버그는 해당 기술을 접목해 실제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도 설명했다.
먼저, 시스템에 대한 디자이너들의 이해 수준이 문제가 됐다. 기존에 없던 기술이다 보니, 테크데모를 만드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됐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디자이너들이 기술의 가능성과 한계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로 협업을 시작해야 했다.
게임 속 ‘규칙’을 쉽게 어기는 디자인 관행도 방해가 됐다. 게임 디자이너들은 그간 가상의 월드를 만들면서 필요에 따라 핵심적 물리 규칙을 깨고, 변형시키는데 익숙해져 왔다. 그러나 물리법칙에 기반한 현실적 게임에서는 사소한 부분에서도 ‘규칙’이 깨져선 안 된다. 몰입을 크게 저해하기 때문. 예를 들어 일부 오브젝트는 지구 중력의 영향을 받고, 다른 오브젝트는 달 중력의 영향을 받는다면 유저 입장에서는 현실감을 느끼기 힘들다.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기존 미디어가 수립한 로봇 디자인의 클리셰들도 걸림돌로 작용했다. 그동안 대다수 창작자는 심미성 위주로 로봇을 디자인해왔다. 엠바크 스튜디오 디자이너들 역시 이런 전례들을 참고해 수많은 로봇을 설계했지만, 현실 물리법칙 아래에서는 잘 움직일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물리 기반 애니메이션 시스템에는 이렇듯 몇 가지 어려움이 있지만, 그에 걸맞은 잠재력도 충분하다. 주요한 세 가지 장점을 설명하며 솔버그는 강의를 마쳤다.
첫 번째, 3D 객체의 물리적 형태에 부합하는 현실적 움직임이 자연히 구현된다. 엠바크 스튜디오는 고릴라와 비슷한 신체 구조를 지닌 ‘골렘’을 만든 뒤 움직임을 학습시켜보았다. 그 결과 실제 고릴라와 흡사하게 움직이는 크리쳐가 만들어졌다.
두 번째, 게임 월드의 ‘규칙’이 변할 경우, 게임 속 객체들이 새로운 규칙에 알아서 적응한다. 엠바크 스튜디오 개발팀은 시뮬레이션 내에 조류의 비행에 관련된 물리법칙을 새로 구현한 뒤, 로봇에 날개를 달고 학습을 진행했다. 그 결과 앞선 ‘고릴라 골렘’처럼, 현실 속 새와 비슷하게 움직이는 ‘새 로봇’을 얻을 수 있었다.
세 번째, 미학적 상상력을 확장할 수 있다. 기존 디자인 통념에 부합하는 ‘멋진’ 로봇들이 물리법칙 하에서 멋지게 움직이지 못한다는 사실은 분명 아쉽다. 그러나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았던 독창적 로봇이 알아서 움직임을 터득할 수 있다는 사실은 장점이 된다. 솔버그는 “못 움직이리라 생각했던 로봇도 시뮬레이션을 거치면 어떻게든 움직이고는 한다. 다만 그것이 우리의 예상과 달라 마치 ‘실패’한 것처럼 보일 뿐”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