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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기자수첩] 게임을 죽이지 마

디지털 다운로드 게임 문화의 아쉬움

에 유통된 기사입니다.
김재석(우티) 2024-05-29 17:08:32
초글링에게 용산 전자상가는 무시무시한 던전이었습니다. 

어린 저는 지하철 4호선 신용산역에 내릴 때부터 긴장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용돈을 손에 꼭 쥐고, 돈을 갈취하는 형들(진짜 있었습니다)과 공 CD에 '구운' 불법게임 매대를 지나 지금은 폐업한 모 지하상가에 입장하면 주얼시디를 잔뜩 쌓아놓은 가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처음 구매한 게임이 바로 RTS <천년의 신화>였습니다.

돈은 항상 부족한데 게임은 고구려, 백제, 신라 버전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돈을 한 번도 안 뺏긴다는 전제하에 같은 모험을 3번이나 떠나야 <천년의 신화>를 다 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막상 세 게임을 다 모으고 나니 드라마 <태조 왕건>의 인기로 고려편이 출시되어 허탈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큰 박스로 출시됐던 '고려편' 합본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미션이 모두 들어있었습니다.

지금도 본가 어딘가에는 당시 모았던 CD게임이 남아있을 텐데요. 기자의 PC에는 더 이상 디스크 드라이브가 없습니다. 걸그룹 에스파가 얼마 전 휴대용 CD플레이어를 출시해 불티나게 팔렸다고 하는데요. 아직도 음반을 CD 형태로 판매하지만, 정작 재생기기는 사라졌다는 것에서 착안한 마케팅이더군요. 클라우드 서비스로 데이터를 저장하는 시대가 되면서 디스켓, CD는커녕 USB 저장장치도 써본 적 없는 사람들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세상에 USB도 모른다니 늙는 것은 서러운 일입니다.


<천년의 신화>의 쌍화살/독화살/불화살 시스템은 대단히 참신했던 기능입니다. (출처: 앙ㅋ[eeuu1133] 네이버 블로그)


# 가질 수 없는 너

요즘 나오는 PC에 CD-롬이 없어진 이유는 단순합니다. DL(디지털 다운로드) 방식으로 거의 모든 게임을 구매하고, 플레이하기 때문입니다. 필요가 없어진 셈이지요.

2023 게임백서에 따르면, 스팀 등 온라인 유통망에서 게임을 구매한 이들은 전체 82.8%였고, CD 실물 패키지를 구매한 이들은 34.2%였습니다. (중복 답변 허용) CD-롬이 없는 '디지털' 콘솔 기기가 나온 지도 수년이 지났으니 말 다 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무시무시하던 용산 던전은 PC 조립 부품이 쌓여있는 쓸쓸한 공실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스팀 라이브러리에 게임을 잔뜩 사놓고 플레이하지 않고 있습니다.

최근, 스팀 포럼에서는 흥미로운 Q&A가 이루어졌습니다. 바로 "유언장을 통해 스팀 계정 소유권을 양도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밸브는 "스팀은 다른 사람에게 계정을 액세스할 권한을 제공하거나, 다른 계정과 병합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이전에도 밸브는 "귀하의 계정은 귀하의 것으로, 가족과 공유할 수는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없다"며 스팀 계정의 양도나 상속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스팀 포럼에 게시된 게임 오너십 상속에 대한 질문과 답변

우리가 ESD에서 구매한 것은 게임이 아니라 게임에 접속할 수 있는 접근 권한입니다. 패키지 구매 행위 또한 그 게임 안에 있는 접근 권리를 구매했을 때 물화(物化)된 저장장치를 함께 구매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최종 사용자 라이선스 협약'(EULA)을 자세히 읽어보면, 우리는 게임을 소유하는 게 아니라 게임을 플레이할 권한을 빌렸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허가 없이 소프트웨어를 개조하는 행위는 원칙적으로 금지됩니다. 결국 스팀 라이브러리는 소프트웨어에 접근할 권리의 집합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모두 저승에 <팀 포트리스>나 <배틀그라운드>를 들고 갈 수 없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수년간 수백만 원 이상 쓴 ESD(전자 소프트웨어 유통망) 계정을 누군가에게 물려줄 수 없다는 건 안타까움으로 남습니다. 이제 패키지로 게임을 구하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게임 이력은 오직 스팀에 저장됩니다.

스팀 라이브러리의 상속이 안 된다면, 페이스북처럼 관리인이라도 지정하는 것을 검토할 때입니다. 그러니까 고인이 생전에 플레이한 <모태솔로>나 <제발~ 내 공부를 방해하지 마>, <마법소녀 카와이 러블리 즈큥도큥 바큥부큥 루루핑>을 비공개 처리하는 기능을 추가하는 것입니다. 이는 스팀의 '가족 공유'로 구매한 게임을 가족에게 나눠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개념의 것으로, 앞으로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 아닌가 합니다.


만약 후손이 생긴다면 그들이 제 <마법소녀 카와이 러블리 즈큥도큥 바큥부큥 루루핑> 플레이 사실은 몰랐으면 좋겠습니다. (최근 들어 자기 게임을 비공개 처리하는 기능이 추가되었으므로 건강할 때 숨기면 됩니다.) (출처: 렐루게임즈)


# '게임을 죽이지 마'


ESD와 DL의 세상이 되며 생기는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지난 4월 유비소프트는 자사 레이싱게임 <더 크루>의 지원 종료를 발표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게임의 플레이는 차단됐습니다. 하지만 <더 크루>는 풀 프라이스 게임이었고, 유비소프트는 이전까지 판매했던 DLC는 물론 게임 접속까지 차단하면서 플레이 자체가 막혀버리게 되었습니다. 이 일로 게이머 사이에서는 '스팀에서 지원을 종료했다고 싱글플레이 차단까지 막는 것은 너무하다'는 의견이 모였고, 결국 '게임을 죽이지 마'(Stop Killing Games)라는 운동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소비자 운동 'Stop Killing Games'의 공식 홈페이지


'게임을 죽이지 마'에 동참 중인 사람들은 퍼블리셔가 '판매'했던 게임에 대한 접근 권한 자체를 차단하는 행위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각국 정부에 청원을 제기했는데요. 영국의 관련 부처(Department of Culture, Media & Sport, DCMS)는 “물리적 지원이 종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게임이 특정 시스템에서 무기한 플레이 가능하다고 소비자가 믿게 되는 경우, 불공정 거래 규정에 따라 게임이 기술적으로 실행 가능하도록 요구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DCMS는 "사용자 기반이 감소하는 비디오게임의 오래된 서버를 유지 관리하는 데 드는 높은 운영 비용이 들기 때문에 기업이 상업적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아무튼 <더 크루>를 돈 주고 샀던 사람들은 이제 <더 크루>를 플레이할 길이 없습니다. 여건만 잘 갖추고 있다면, 수십 년 전 구매한 고전게임을 곧잘 실행할 수 있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기자도 이따금 어린 시절 구매했던 '레전드' 피처폰게임을 다시 하고 싶습니다. PC에 가상 환경을 구현해 피처폰게임을 다시 하는 모습이 종종 보이고는 합니다만, <놈>이나 <짜요짜요 타이쿤> 같은 게임은 피처폰의 물성(物性)을 고려하여 개발됐기 때문에, PC로 하면 그 맛이 안 날 듯합니다. 중고나라에는 이틀 전에도 <영웅서기 3>이 담긴 피처폰이 12만 원에 올라왔습니다.

지난 플레이엑스포에서 시연된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리파인>처럼, 예전 게임을 요즘 환경에 맞게 새로 만들어 보여주는 모습은 분명 반가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게임업계가 과거의 게임을 오롯이 보존하고 전수하는 데에도 조금 더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듀랑고: 야생의 땅>은 서비스를 종료했지만, '창작섬'은 남아있어서 게임을 추억하고 싶은 게이머가 가끔 찾아와서 놀 수 있듯 말입니다.

플레이엑스포 2024 대원미디어 부스의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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