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은 몇 번을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죠. 그런데 우리는 게임의 역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요? 여러 차례 '게임의 역사'에 대한 연구가 소개되기는 했습니다만 대다수가 '메인스트림'인 일본이나 미국 이야기입니다. 국내에서도 게임 역사를 조명하려는 시도가 있어왔지만 산업의 성과나 게이머의 추억에 기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영욱 게임개발자 겸 게임역사가는 사료(史料)를 수집하며 한국 게임계에 어떤 일이 있었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서 게임 개발과 문화가 성립되었는지를 연구합니다. 그는 오늘 NDC 강연에서 '발굴되지 않은 한국 게임의 역사'를 주제로 강연했습니다. 그가 오늘(26일) 꺼낸 이야기는 그동안 발굴되지 않았던 아마추어 개발자들의 역사입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말이 있죠. 한 사람의 게임개발자를 키우는 데에도 가족, 학교, 국가정책, 문화, 학원, 커뮤니티, 기술 등의 조건이 형성되어야 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한국의 1940년대에 태어났다면 게임개발자의 길을 걷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게임개발자들은 자신의 주변에 게임이 존재했기 때문에 게임 만드는 사람이 됐습니다.
오영욱 강연자는 문화와 기술에 주안점을 두고 어떻게 아마추어 게임개발자들이 탄생했는지 설명했습니다.
지금은 어린이대공원 옆에 있는 '서울어린이회관'은 1970년부터 1974년까지 남산 자락에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과학오락실'이 있었는데요. 1970년 경향신문이 어린이회관을 찾은 어린이 1,94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이들이 가장 재미있게 즐긴 시설은 과학오락실(44.4%)이었습니다.
당시 비치된 게임은 대체로 단순한 기계식 전자 회로도로 구성된 단순한 디지털 아케이드 게임이었습니다. 부산에도 과학오락실이 있었다는 기록이 발견되며, 미군 px 근처에 오락실을 즐겼다는 추억담도 있지만 자료가 많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 1970년대부터 오락실에서 게임을 즐기는 문화가 형성되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1976년, 국산 디지털 손목시계 전문 회사였던 '오림포스 전자'가 GAMATIC 7600을 6천 대를 수출했습니다. 게임기는 마이크로 프로세스 방식을 이용한 게임 기기로 테니스, 하키, 스쿼시 등의 게임이 내장되어있었죠. 국내에서는 GAMATIC 7600과 같거나 유사한 모델의 '텔레비전 게임기'가 '오트론'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되었습니다.
비슷한 시기 금성과 삼성이 게임기를 만들어 수출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정확히 어떤 디바이스를 만들어 수출했는지는 나와있지 않습니다. 이들 게임기 모두 수출을 위한 외국 게임 기판의 복제로 오영욱 강연자는 '퐁 클론'으로 정의했습니다. '퐁'은 1972년 아타리가 출시한 아케이드 게임기를 뜻하는데요. 외국의 퐁/퐁 클론 수집가들은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도 수집 품목에 올린다고 합니다.
1970년대 한국은 TV 보급율조차 높지 않던 시절이었지만 많은 이들이 오트론을 보며 꿈을 키웠습니다.
동네 전파상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게임을 만난 곳은.
동그란 볼륨 같이 생긴 패드를 돌려가며 조종하는 '오트론 게임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파상 아저씨가 어디선가 그 물건을 구해왔는데, 온 동네 주민들이 다 나와서 구경할 정도로 인기였다. 그런 물건이 신기할 수 밖에 없었던 70년대 말이었다.
'오트론 게임기'는 요즘 나오는 콘솔 게임기와 비슷하다. TV에 연결해, 패드를 돌리며 테니스 같은 게임을 했으니까. 그렇다고 여러 게임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저장된 서너 개의 게임만 하는 전용 게임기였다. 아마 오리지널은 미국 아타리의 '퐁'이었을 것이다. 전파상에서 본 것은 '퐁'을 베낀 ‘짝퉁’이었을 테고. - 송재경, 나의 게임 입문기 中
비슷한 시기 '라디오와 모형' 등 전자잡지에서는 네온판에 직접 납땜을 해서 회로를 만드는 게임의 가이드를 소개했습니다. 회로도를 완성하고 그 위에 자신이 직접 그림을 그려서 즐기는 게임이었습니다. 인터넷 커뮤니티도 개발자 컨퍼런스도 없던 시절, 독자들은 잡지의 중고장터/교환 코너를 통해 팁을 주고 받거나 부품을 만들어 거래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게임 전문 잡지가 없던 시절, 전자잡지에서 게임에 대한 소식을 비중 있게 다루었습니다. 1979년 7월에는 TV 게임 콘솔 '아타리 CX' 시리즈의 조작법과 콘텐츠를 소개했으며, 이어서 11월에는 '미사일 인베이더'에 대한 정보를 '긴급 취재'해 보도했습니다. 당시 매체에서 굉장히 '트렌디'하게 기술 정보를 따라갔던 것이죠.
당시 '정의감의 불타는' 라디오와 모형 기자는 미사일 인베이더에 대해 '이것으로 (게임을) 하면 50원을 넣지 않아도 얼마든지 인베이더 게임을 즐길 수 있다'라고 소개했습니다. 구성 품목을 상세하게 적었는데 이후 독자 토론에서는 '기판 위에 이렇게 만드니 얼추 비슷하게 되더라' 등의 이야기가 오갔다고 합니다.오 강연자는 이를 읽고 "이 사람들은 인베이더를 사려는 게 아니라 만들려 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답니다.
1980년 들어 해외에서는 마이크로 컴퓨터와 이를 바탕으로 한 게임이 속속 등장하고 있었습니다. 라디오와 모형에서도 마이콤의 스펙과 사용법은 물론 '간단한 게임을 만들어 보자!!'라는 내용의 강의 내용도 실려있었습니다.
1981년 1월, 삼보전자가 한국 최초의 컴퓨터 SE-8001를 개발하는데 성공합니다. 뒤이어 금성은 마이크로 컴퓨터, 삼성은 교육가정용 퍼스널 컴퓨터(퍼스컴)를 개발하는 데 성공합니다. 1983년 9월 라디오와 모형은 삼성 퍼스컴 휴베이직 특별 연재를 합니다.
이 시기 삼성은 업계에서 처음으로 퍼스컴 소프트웨어 공모를 했습니다. 오영욱 강연자는 "이러한 공모전은 자사 플랫폼 하면서 유저들 끌어모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소개했는데요. 이후 컴퓨터를 만든 회사들은 점차 자사 하드웨어에 사용할 소프트웨어 공모전을 확대해나갔습니다.
정리하자면 이미 70년대부터 게임을 향유하는 문화가 알음알음 형성되었고 '핑 클론', 개인용 PC의 개발, 소프트웨어 공모전 등 기술의 발전으로 게임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를 견인한 것은 '라디오와 모형' 등 전자잡지의 역할이 큽니다. 공모전을 통한 게임개발자 탄생의 흐름은 1983년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컴퓨터산업이 발전을 지켜보던 정부는 1983년을 정보산업의 해로 지정합니다. 체신부와 과학기술처는 정보산업 육성 정책으로 12개 정보산업체의 공동출자를 통해 주식회사 정보시대를 세웁니다. 정보시대는 '마이크로 소프트웨어' 등의 컴퓨터잡지를 만들어 판매합니다. 이후 전자잡지가 맡았던 게임 소개 역할은 컴퓨터잡지가 대신하게 됩니다.
당시 컴퓨터는 저렴한 물건이 아니었지만, 국산 컴퓨터가 속속 출시되면서 '또래 중에 몇 명은 가지고 있는' 물건이 됐습니다. 그 시절은 저작권 개념이 희미했기 때문에 컴퓨터를 사면 슬롯머신, 자동차경주 등 테이프로 된 게임을 공공연하게 끼워줬다고 합니다. 1985년 대우전자는 '재믹스'를 발매했습니다. 컴퓨터와 게임의 문턱은 이렇게 점점 낮아졌습니다.
신세계를 접한 이들은 '뭐든지 구하고 만들 수 있는' 세운상가로 떠납니다. 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컴퓨터에 대한 정보를 공유했습니다. 당시 잡지 '학생과 컴퓨터'와 인터뷰한 면목중학교 3학년 나상남은 "서로 프로그램도 직접 짜보고 게임같은 것도 바꾸어 쓰는데요. 우리같은 애들이 볼만한 책들이 없어요. 그래서 애들과 함께 가끔씩 여기에 와서 모르는 것을 물어봐요."라고 말했습니다.
제 인생 최초의 컴퓨터는 애플II (Apple II, 1977) 컴퓨터입니다. 당시 중학생 때 세운상가에서 조립형 애플II 컴퓨터를 저렴하게 구매했고, 주로 <울티마2>(ULTIMA II), <울티마3>(ULTIMA III) 게임을 했습니다. / 넥슨코리아 정상원 부사장, 넥슨컴퓨터박물관 '내 인생의 컴퓨터'
초등학교 6학년 때 애플 컴퓨터 호환 기종으로 학원에서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컴퓨터 학원에서만 사용하다가 어머니에게 졸라 종로 세운상가에서 애플 컴퓨터Ⅱ 호환기종을 샀던 것이 최초의 컴퓨터였습니다. / 강신철 전 네오플 대표, 넥슨컴퓨터박물관 '내 인생의 컴퓨터'
<아래아한글>은 서울대 컴퓨터연구회 출신의 이찬진, 김택진, 김형집, 우원식 등 4명이 만들었다. (중략) 소프트웨어는 만들었지만, 팔 줄은 몰랐다. 인터넷도 없던 시대였다. 선배인 이찬진이 전자제품 유통상들이 모여있는 세운상가를 막연히 돌았다. 여기서 만난 러브리소프트와 계약을 맺었다. / [좌충우돌] 4월 24일 - 한컴의 데뷔, 아래아한글 1.0 발매
세운상가에서 하나의 씬(Scene)이 형성됐던 것입니다. 아마추어 개발자들은 각종 공모전에 출사표를 던졌습니다. 배급 업체 토피아는 이렇게 모인 공모작을 모아 1986년 MSX용 '공모 팩' 1집과 2집을 출시합니다. 한국 최초의 컴필레이션 게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같은 해 케텔이 서비스를 시작했죠. 케텔은 훗날 하이텔이 됩니다.
1987년 저작권법에 '컴퓨터 프로그램 보호법'이 포함됩니다. 쉽게 말해서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불법으로 복제하면 안 된다는 법이죠. 고등학생 남인환은 '최초의 국산 상용 패키지 게임' <신검의 전설>을 만들어 화제가 됐습니다. 게임은 '화제의 베스트 셀러'로 '애플 퍼스컴계에 불멸의 금자탑'을 세웠다고 합니다.
게임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만들어지고 최초의 상품화된 게임이 등장한 1987년은 한국 게임 산업에 일종의 기점과 같습니다. 미리내를 비롯한 게임사도 1987년을 기점으로 하나둘 세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989년 케텔에는 개털 오락 동호회, 줄여서 개오동이 등장합니다.
90년대 게임개발자들은 PC통신에 모였습니다. 1992년 개오동에는 개발 관련 커뮤니티가 등장했고, 1993년 1월에는 개오동에서 게임제작 세미나를 열기도 했습니다. 이어서 하이텔에 게제동(게임제작자동호회)이 세워집니다. 당시 개발자들은 PC통신에서 구인/구직을 했습니다. 당시 구인/구직 코너는 오늘날 '게임잡'을 방불케합니다.
1995년 나우누리에 게임제작자포럼이 설립됐고,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그 안에서 소모임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오영욱 강연자는 "소모임 중에 단테라는 'RPG만들기' 소모임이 활발한 활동을 했다"고 증언했습니다.
하이텔에서 생긴 개오동과 게제동은 이후 한국 게임 산업과 문화에 큰 영향을 줬습니다. 게제동은 아마추어 개발자의 커뮤니티 역할과 함께, 급성장하는 PC 패키지 게임 산업의 인력풀 역할을 했습니다. 김학규, 김동건, 이은석 등 쟁쟁한 개발자들이 게제동에서 활동하며 자신의 지식을 나누었습니다. 당시 개발자들은 각종 공모전을 통해 자신의 창작욕을 표출했습니다.
정보시대의 컴퓨터잡지의 바통을 이어받은, 90년대 초 창간된 '게임챔프' 등 게임 전문 잡지가 연 공모전이 대표적입니다. 게임챔프는 1992년 '게임 시나리오 공모전'을 열었죠. 당시 게임 잡지는 게임 개발 강좌나 국내 게임 개발자의 인터뷰 등을 공개하면서 게임 개발의 방법론을 제시하고 게임과 관련된 담론을 주도했습니다.
게제동에서는 1997년 100k(킬로바이트) 게임 공모전이 대표적입니다. 당시 공모전을 주도한 것은 시삽 서관희, 우승작은 나크와 파파랑의 <삭제되었수다>입니다. 1999년 제우미디어는 아마추어 게임 콘테스트를 열었습니다. 그땐 게임물등급위원회가 없었기 때문에 잡지의 부록으로 콘테스트 당선작들이 유통되었습니다.
2000년대 들어 더 많은 게임 공모전이 생겨났습니다. 여기에 많은 지망생이 도전했고, 이들 중에는 지금도 업계에서 활약 중인 개발자가 많습니다. 하지만 정리된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안타깝게도 수상 내역을 본인들만 알고 있는 사례가 꽤 있습니다.
공모전 등 게임을 '진흥'하려던 분위기는 2005년 바다이야기 사태 이후 한풀 꺾이게 됩니다. 사태 이후 총리는 대국민 사과를 하고, 대통령은 유감을 표명했습니다. 구속된 사람만 2,812명이라고 합니다. 2006년엔 게임물등급위원회가 발족했죠. '바다이야기 때문에 게임 산업이 멈췄다'라고 단언하기는 힘들지만, 확실히 이전과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한 연구자는 오영욱 강연자에게 "바다이야기 사태 이후로 게임과 관련한 연구에 학계에 지원이 줄어들었다"라고 증언하기도 했습니다.
게등위는 등급 분류를 받지 않은 아마추어게임을 단속했습니다. 2010년에는 RPG쯔꾸르 커뮤니티 '니오티'에 "등급물 분류를 받지 않은 게임을 내놓지 마라"라는 시정요청공문을 보냈습니다. 2019년 다시 불거진 플래시게임 배포 규제도 이러한 규제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있다고 오영욱 강연자는 설명했습니다.
2003년 문을 연 '대한민국 인디게임 및 게임 아이디어 공모전'은 2012년까지 명맥을 유지했지만 그 이름이 '글로벌 게임 개발 경진대회'로 바뀌면서 이전 자료가 모두 소실되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일련의 사태 이후 게임 공모전의 규모도 다소 줄었지만, 아마츄어들은 계속 도전했습니다. 인디게임 대회 '똥똥배대회'는 2009년부터 현재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똥똥배 본인은 2015년까지 개최, 이후 커뮤니티 중심으로 열리고 있음) 2014년 이후 '아웃 오브 인덱스'를 필두로 인디게임의 장이 새로 열렸습니다. '부산 인디 커넥트'와 'GIGDC'도 그 뒤를 이었죠.
오영욱 강의자는 "김동건 본부장이 올해 NDC 기조강연에서 옛날 이야기를 남겨 다음 세대의 토양을 만들자라고 말한 것처럼, 지금이라도 토양을 만들자"라고 당부했습니다. 개발자들이 자신의 작품이 어떤 게임 혹은 매체에 영향을 받았는지 정리하고, 기록해 역사를 만든다면 과거를 반추하고 미래를 전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과학오락실부터 아웃 오브 인덱스까지, 세운상가부터 판교까지 아마추어 개발자들의 도전은 게임 산업을 만든 '토양'이 되었습니다. 점을 이어서 선을 만들어 '계보'를 만드는 일은 더 단단한 토양을 위해 꼭 필요한 작업으로 보입니다.